제겐 나름 오래된 취미가 있습니다. 전시회 관람인데요. 주말이면 여기저기 혼자 갤러리 투어를 합니다. 딱히 예술에 지식이 있는 건 아니고, 단순히 감상하는 걸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오랜만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2021 올해의 작가상>을 보고 왔습니다. 사실 그 유명한 이건희 컬렉션을 보고 싶었는데 예약이 피켓팅 수준이더군요.
현대미술은 어려워서 좋아하진 않지만, 올해의 작가상은 매년 챙겨보는 전시입니다. 어김없이 올해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작품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 같은 건 제 기분 탓이겠죠? 그럼에도 다행히 기억에 남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늘 노려보았던 대상이 어느 순간 흐물흐물해져 있는 걸 알게 된다. 딱딱하던 경계가 물컹해지면 앞, 뒤, 옆의 것들이 삐져나오며 서로 섞이게 된다.
이 글귀를 읽자 무언가 가슴에 탁-하고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도 모르게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전시를 떠나 저 글귀 자체에 말이죠. 제가 맺어온 인간관계에 대입해보니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저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지향합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냈느냐가 친밀함의 척도죠. 친한 친구들도 기본적으로 안 지 10년 이상된 친구들입니다. 성향 자체가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해서 그런지 빨리 친해지려고 어설프게 무언가 하기보다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지는 편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어느덧 둘 사이의 경계는 흐물흐물해집니다. 그럼 이제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 의도하지 않은 행동들이 막 삐져나오게 되죠. 삐져나오는 것들을 저는 인간적인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매력을 하나둘씩 발견하고 겪고 나서야 더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알려주는 1차원적인 정보는 직접 체득한 정보보다 한정적이거든요.
한 사람을 이해하고,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경계를 허물기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습니다. 제 주위의 어떤 친구는 성향이 잘 맞기만 하면 알게 된 기간이 짧더라도 금방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은 다르죠. 하지만 저는 제 페이스와 다르게 급하게 가까워지려고 하면 꼭 탈이 났었습니다.
대학교 때의 일입니다. 스무 살 첫 학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온 다양한 친구와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초중고를 모두 같은 동네에서 나왔기 때문에 새 친구를 사귈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혀 연고도 없고 지인이 겹치지도 않는 사람들을 만난 건 처음이었죠. 매일 똑같이 술을 마셔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노는 게 정말 재밌었습니다. 같은 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 다른 학교의 사람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생기면 꼭 참여하곤 했습니다. 그냥 모든 모임에 다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을 만나는 데 엄청나게 매료되어있었죠.
단순히 사람이 좋았고, 아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줄 알았습니다. 더 친밀한 사이가 되기 위해 경계를 급하게 낮추고 거리를 좁히는 데에 부단히 애썼습니다. 하지만, 곧 엄청난 외로움과 상실감이 몰려왔습니다.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꾸며진 나를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또 친구 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분명 100의 마음이었는데 상대방은 50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인간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해본 결과 저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게 더 가치 있음을 배웠습니다. 관계는 느슨할수록 오히려 오래 유지된다는 것도요. 지금도 저는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그 사람의 개성과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저처럼 경계를 허무는 시간이 필요한 분들이신가요? 아니면 애초에 딱딱한 경계가 전혀 없는 파워 인싸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