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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QK Apr 09. 2020

북촌방향

‘인생’이라는 주인공, ‘나’라는 풍경

 


살다 보면 뭔가 특별하고 다를 줄 알았던 나의 생(生)이 결국엔 누군가가 걸어갔던 삶의 궤적을 비슷하게 반복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주인은 삶 자체이고, 우리는 그 삶을 연기하는 배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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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그 사람과 헤어진다. 그리고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연애를 한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과 하는 ‘비슷한’ 연애에서 어떤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XX염색체와 XY 염색체가 만나는 똑같은 사랑 얘기에 부여되는 특별함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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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하면서 깨닫는 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 줄 알았던 상대방이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다 거기서 거기고 사실 다 비슷비슷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권태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에 대한 환상을 갖고 떠나게 된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놀라운 지점은 여기에 있다. 그 권태롭고 일상적인 지점에 영화적 마술을 채색한다. 공간과 시간을 뒤섞어버리면서 똑같은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그 사이에서의 티끌만 한 특별함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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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우리 모두는 죽기 때문에 비극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비극적 존재’라는 단어로 삶을 요약하고 싶지 않다. 포크너가 얘기했듯, 우리는 결국 우리가 꿈꾸는 완벽함에 닿을 수 없으니 우리의 삶은 그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평가되어야 한다. 결국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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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우연’들이 겹쳐서 만들어내는 ‘운명’에 마주할 때 우리는 그것을 운명임을 직감할 수 있을까, 그냥 별난 우연들이 겹쳤네라고 말하고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배우가 대사를 읊조리면서 결국에는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듯이 결국에는 정해진 각본 속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모든 우연들을 끌어들여서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은 그 해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면서 영화를 돌려본다. 그러고는 역시나 나는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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