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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ney Kim May 02. 2024

138화 새로운 여정 (마지막화)



정법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끝내는 게 맞는 건가요..?”


선준은 지국천왕의 말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윤대감이 저승으로 가지 않고 여전히 영계에 남아있다는 게 영 찜찜했다.


자신은 분명히 목숨을 걸고 일령을 소멸시키면서 까지 최선을 다해 공격했지만 윤대감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악신, 악귀들과의 한바탕 전쟁이 난 북악산 일대는 난장판이 되었다. 게다가 일행들의 인명피해도 컸다.


“자자,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인원 파악을 해봅시다.”


정법이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번 대악귀전을 통해 얻은 것도 있었지만 분명히 큰 피해도 있었기 때문이다.


“저와 제 딸(자령)은 조금 다쳤지만 무사합니다.”


“전신아, 차선아 괜찮지?”


“어.. 응”


“네, 신무패도 다 있어요.”


“근중과 천검은 어떠오?”


“장태가 중상입니다. 곧바로 의원을 불러야 할 정도구요. 물포는 좀 크게 다치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닙니다.”


근중에 찢어진 옆구리에 옷가지는 댄 체로 걸어오며 말했다.


“아 그리고 천검은 저기 산아래에 앉아있습니다. 천검이 크게 다쳤고 말봉이와 진둘이도 다쳤는데 천검을 돌보는 중이구요. 그런데..”


“그런데..?”


“병팔이가 죽었습니다.”


“음.. 어쩔 수 없지. 명복을 빌어주자.”


곧 은진의 곁으로 해치와 불가살이가 나타났다.


“갸루루루룽..”


“아구랴, 아구랴.”


“어이쿠, 쟤네들 할멈이 사라지니까 이제 거기로 붙었냐?”


정법이 아주 오랜만에 웃었다. 해치와 불가살이의 순수한 모습이 마냥 귀엽게 느껴진 것이다.


“네.. 만약, 괜찮다면 이제 제가 흰둥이와 불덩이를 데리고 있어도 될까요?”


은진이 조심스럽게 묻자 정법은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되고 말고. 아마 그게 누이가 바랐던 일일 거야. 누이도 걱정했거든. 자신이 저승으로 가고 나면 쟤네들은 누가 돌보냐며.”


어느새 해치와 불가살이는 은진의 다리에 딱 붙어 앉았다. 둘 다 은진의 곁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천상 덩치만 큰 강아지 같았다.


“아.. 그런데 산비초의 시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달이 사방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 아까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 걸 봤거든요.”


“혹시 아까 백화 때문에 산등성이가 무너질 때 같이 휩쓸려 사라진 건 아닐까요?”


귀로의 추리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산비초는 길달의 근처에서 쓰러졌고 길달이 있던 곳은 산사태에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죽었거나 혹은 죽어갈 뿐이야. 그 몸으로 뭘 다시 할 순 없어. 그리고 그렇다한들 이제 혼자서 뭘 하겠냐.”


맞는 말이었다. 이승에서 윤대감도 사라진 마당에 산비초 혼자 예전처럼 세상의 물을 흐릴 순 없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제가 나설 차례입니다.”


“어, 포도부장님..! 무사하셨군요.”


산아래에 숨어있던 포도부장이 어느새 일행에게 다가왔다. 선준을 비롯해 많은 일행들은 무사한 정만을 보며 반겼다.


“죄.. 죄송합니다. 이번 싸움에서 전 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자칫 잘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산 입구에서 숨어있었습니다. 숨어있다 보니 다친 곳도 없고..”


정만의 고백은 정법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에이, 뭐. 우리 모두 다 한 게 별로 없소. 겸세랑 이무량 그리고 막판에 왕도깨비와 선준 저 양반이 거의 다했지.”


그럼에도 정만은 부끄러운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명색이 포도부장인데 비겁하게 숨어있었다는 점이 영 마음에 걸렸다.


“아.. 아무튼 이제 전국에 있는 산비초의 양귀비 밭들에 대한 전수 조사와 폐기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조선땅에서 아편은 뿌리를 뽑아야죠.”


정만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박대감의 비리와 이를 따랐던 포도대장 및 일당에 대한 일벌백계는 물론이거니와 김대감님에 대한 모함도 싹 거둬들여야 했다.


이참에 알게 된 전국의 양귀비 밭부터 한양 일대의 아편굴까지, 정만은 조선 내 아편의 뿌리를 모두 뽑아내는 것을 삶의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복수의 끝에는 언제나 후련함과 허탈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새로운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 대가는 때로는 짧고 참혹하지만 또 때로는 길고 지리한 시간과 겨루며 치러야 한다.



‘저벅 저벅’


“자야, 배고프지 않으냐?”


“지는 괜찮구만요. 아재는 요?”


“난 점심 때 먹은 게 아직도 배부르다.”


선준은 작년보다 부쩍 키가 큰 행장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째 너도 같이 가볼래?”


“아, 거기요?! 가도 된당가요? 당연하지요. 같이 가자요, 아재!”


“안될 게 있겠냐. 그럼 집에 짐 좀 놔두고 가자.”


행장이는 신이 나서 먼저 집으로 달려갔다.


선준은 한강 건너 관악산 자락에 집을 하나 마련했다. 여전히 축귀가 본업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만이 선준을 붙잡았다.


‘어차피 아편쟁이들을 잡으려면 무력도 필요하고 영력도 필요하네. 귀로 선생님도 한양에 머물면서 도와주기로 했으니 자네도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우선 한양 주변을 정리하고 그다음은 전국적으로 나갈 걸세. 내가 대감님께 요청드려서 관청에 자네 자리도 하나 알아봐 줄 거고.. 그러면 돈도 벌 수 있으니 생활이 좀 안정되지 않겠나?’


선준은 무엇보다 안정이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행장이는 성장 중이고 녀석에게 지금 필요한 건 지속적인 먹을거리와 편안한 잠자리였기에 행장이를 위해서라도 그 제안을 거부할 순 없었다.



“어허이, 거 몸이 불편한데도 자주 나오네 그려?”


“이히히, 먹고는 살아야죠.”


지팡이를 짚은 사내가 시장을 막 돌아서자 푸줏간의 한 백정 아재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에이, 이놈의 지팡이, 이제 갖다 버려야지.’


사내는 시장에서 볼 일을 본 후 왔던 길로 도로 돌아 빠져나왔다. 사내는 골목 어귀에서 주변을 쓱 둘러보며 살피더니 구석진 곳에 지팡이를 냅다 던져버렸다.


“아유, 귀찮아 죽을 뻔했네.”


그리고 답답했다는 듯 한쪽 눈을 가렸던 안대도 걷어내고 긴 머리를 뒤로 넘긴 후 곧장 기지개를 켰다.


“으갸갸갸갸갸갸. 아유~ 아픈 척하기도 힘드네. 이제 뭐 이 정도 지났으면 알아볼 사람도 없지 않을까?”


“룰루~ 오늘은 얼마나 벌었나 볼까아? 이히히”


‘짤랑, 짤랑’


사내는 두툼한 돈 주머니를 열어본 뒤 혼자 히죽거렸다.


자신이 원하던 삶을 다시 되찾은 사내는 더 이상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게 일하고 적당히 벌면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어이, 거기.”


골목을 지나가던 사내 앞으로 웬 떡대 좋은 남자 셋이 사내의 길을 가로막았다.


“응? 나?”


“그래, 이 썩을 것이 두 번 말하게 하네. 그럼 지금 이 골목에 너 말고 누구 있어? 저 뒤에 둘?”


셋 중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사내의 뒤를 가리키며 킥킥거렸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몽둥이를 둔 남자 둘이 더 있었다.


‘아나.. 이것들이. 낄낄.’


“형씨 오늘 돈 좀 벌었나 본데, 그거 주고 가면 그냥 몸성히 보내드릴게.”


두목의 말이 끝나자 사내는 돈 주머니를 다시 허리춤에 넣은 뒤 녀석에게 다가갔다.


“아, 아직 풋내 나는 어린놈들이구나. 어쩐지, 그래 날 못 알아 볼리가 없는데.”


그러자 두목이 손에 들고 있는 긴 칼자루로 사내의 가슴팍을 꾹꾹 밀며 말했다.


“누군데? 응? 니가 누군지 내가 알아야 해? 낄낄. 내가 지나가는 아재 돈 좀 뺏겠.. 우욱.. 끄아아아아..!!!”


두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는 두목의 옆구리를 손끝으로 푹하고 찔러 넣었다.


곧 두목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어나왔고 두목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어버렸다.


“끄으윽..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멧돼지의 가죽도 뚫어버리는 괴력을 가진 사내의 손끝이니 한낯 사람의 뱃가죽쯤은 쉽게 뚫었다.


“하아, 너네들이 아직 어려서 모르나본데. 히히히.”


두목은 이제 고통과 공포에 두 눈이 일그러졌다. 다른 녀석들은 겁에 질려 이미 달아난지 오래였다.


“자, 똑똑히 기억해. 내 이름은..”


“끄으으, 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이름은.. 산비초야.”


‘푸아악’


‘풀썩’


두목은 피를 쏟으며 쓰러져버렸고 산비초는 깔깔대며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산비초가 지나간 길의 언덕배기 위에는 길달이 서서 선준 일행에게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준, 봤지?”


“네, 포도부장님.”


“자, 이제 새로운 판이 시작됐으니 우리도 움직여볼까?”


선준과 정만, 행장이는 조심스레 산비초의 뒤를 밟았다. 당장 녀석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녀석의 근거지만 확보할 요량이었다.


산비초가 더 크게 판을 벌려,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아편상들과 연결이 되면 한방에 아편상 무리를 잡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넉넉한 시간일 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대서(大暑, 7월 22일 경)가 지나면 보통 양귀비의 열매를 수확하니, 첫 눈꽃이 피는 상강(霜降, 10월 23일 경) 쯤에는 녀석들이 활개를 칠 것으로 보였다.


선준은 그때가 가장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막연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일령은 없지만 여전히 행장이가 함께했다.


그리고 윤대감에 대한 복수를 통해 알게 된 좋은 인연들은 가족이 없는 선준에게 마치 대가족이 생긴 기분마저 안겨주었다.


윤대감이 결국 악신이 되며 결과적으로 복수는 제대로 된 끝을 맺지 못했지만, 참 신기하기도 선준은 이후 생에 처음으로 안정감이라는 것을 맛봤다. 그리고 그 안정감은 삶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는 것 역시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해는 서산으로 뉘엿 뉘엿 넘어갔다.


그들은 산비초의 거처를 알아낸 뒤 별다른 조치 없이 곧장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평안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배부른 저녁밥에 금세 곯아떨어진 행장이 옆으로 선준은 처음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봄날의 어느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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