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끄적끄적 #2
"가습기가 고장 났어."
일이 있어서 부산에 2박 3일로 다녀왔다. 아기 싹을 틔워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고사리에게 습기를 채워주기 위해 가습기를 켜려던 아내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며 말했다. 아무리 해도 켜지지를 않는다기에 고장이 났을 것이라며 AS에 보내보자고 말하자, 불과 3일 전까지 멀쩡했는데 고장이 났겠냐며 아내가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고장 난다고?"
"고장이라는 건 원래 갑자기 나는 거지
예약하고 고장 나는 건 아니니까?"
나는 이렇게 답하고 가습기를 잘 포장해서 AS센터에 보내주었다.
그런 일이 있던 날의 저녁시간. 부산 여행을 다녀오는 기차에서부터 조금씩 오던 발목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많이 걸어 피곤하기 때문에 오는 통증이겠지 싶어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절뚝거리며 걸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눈에 보기에도 발목 쪽이 퉁퉁 부어있었다.
근육통이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내 나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발을 질질 끌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를 찾았다. 항상 아플 때만 스세권, 역세권보다 병세권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약을 걸지 않아 40분 정도를 기다리고서는 진료실에 들어가서 아픈 위치를 설명했다. 눈으로 보고 몇 번 눌러본 선생님은 아킬레스건염이라며 엑스레이를 찍을 필요도 없이 염증이 가득 차서 생긴 통증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었다. 아킬레스건염은 많이 걷거나 오래 서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생기는 증상이라며 혹시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도 물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이어트 때문에 운동을 과하다 싶게 했는데 그게 원인일 수 있냐고 하자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선생님. 근데 왜 갑자기 아픈 거죠?"
선생님이 멀뚱멀뚱 보시다가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며 답했다.
"갑자기가 아니에요. 얘도 버티고 버티다가 지금에서야 통증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대로 뒀으면 아킬레스건 끊어졌어요. "
바디프로필을 찍을 때도 살을 빼겠다고 산을 3시간씩 뛰어다니고 찍은 후에도 10킬로 정도는 대중교통 없이 뛰어다녔던 것이 내 과거가 생각났다. 몸이 가벼워져서 충분히 감당이 가능한 운동량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발은 그걸 못 견디고 있었나 보다. 운동량도 운동량이지만 발목 스트레칭을 충분히 해주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내가 혹사시켜서 나온 결과물이다.
염증을 빼는 주사를 맞으며 초음파를 보던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본 사례 중에 가장 심한 염증이라며 3주는 발목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말라며 경고했다. 이 와중에 그럼 상체 운동은 할 수 있냐며 묻는 나를 정말 한심하게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을 뒤로하고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혼을 한 친구에게 왜 갑자기 이혼을 했냐고 묻자 시장에서 갑자기 화를 내며 이별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사정을 들어보니 남편이 시장에서 가게 사장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아내를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사장님 편을 들었던 것. 시장 한복판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떠나갔다고 한다. 친구들은 겨우 그 일 때문에 이혼을 했냐고 궁금해했지만 남편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동안 살면서 잘못한 일이
이거 하나뿐이겠냐.
그래서 (이혼도장) 찍어줬어.
- 로맨스는 별책부록 중-
나도 누군가에게 왜 갑자기 그러냐는 질문을 종종 했던 것 같다. 갑자기 그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버티고 버티다가 끊어질 것 같아서 일어난 일이겠지. 기계도 몸도 사람도 갑자기 그러는 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