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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오에서이십육 Oct 30. 2021

혼술 권하는 글

스스로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할 땐

2021.05.21


백수 18일 차. 오늘도 나의 풍류는 영락없이 계속된다. 오늘은 '퇴근' 후 혼술을 하러 왔다. 그것도 무려 불타는 금요일 밤에.


처음으로 술을 먹어 본 건 수능이 끝나고서였다. 평상시에 술을 마시지 않는 부모님과 과자를 산더미같이 쌓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시큼 씁쓸한 보리차 같은 맛에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탄산도 영 거북했다. 들이킬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무엇을 위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술에 환장하는 것인지 궁금해했었다. 세 시간 동안 라거 한두 잔을 꺾어 마셨으니 아무도 취하지 않았고, 이야기는 정적을 간신히 메우며 늘어지고 잔에는 미지근하게 김 빠진 맥주만 덩그러니 남은 채 시시하게 끝이 났었다.


그로부터 7년 후, 그러던 내가 이제는 하다못해 술을 혼자 먹으러까지 나온다. 술 먹으려고 발품까지 팔아가면서 온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땀을 줄줄 흘리며 한 시간 반 교통체증을 뚫어가면서 온다. 혼자 밥을 먹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학창 시절을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서 그 공포는 조금 누그러지지만, 밖에서 혼자 먹는 술의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내가 혼술 하러 간다고 하면 의아해하며 '혼술이요?'하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 혼자서 무슨 재미로 술을 마시냐고.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보는 넷플릭스 화면에 간간히 비치는 내 모습보다는, 나름 어엿하게 차려 입고 사연 있는 사람처럼 술을 홀짝여 주변 사람들을 흘끔흘끔 쳐다보게 만드는 보는 내 모습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적당히 기분 좋아질 만큼 술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이 슬슬 술기운이 올라 평소에는 절대 꺼내지 않을 말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오늘 열심히 찾아온 바에서는 옆 테이블 사람들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을 흘려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다른 바에서는 나도 누군가에게 흥미로웠을 이야기를 흘리고 갔을 것이다. 헌 이야기를 하나 놓고 가고, 새 이야기를 주워 가는 괜찮은 시스템이다.


공적인 공간에서 혼자 술을 마셔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 경험을 권해보고 싶다. 보통 카페는 많이들 혼자서 간다. 카페인에 취해 하려던 일을 더 빠르게, 더 격렬하게 한다. 밥을 혼자 먹는 경우도 많다. 정말 그 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거나, 혼자가 아니었다면 같이 먹어야 했던 사람과 먹기가 싫었거나, 같이 먹을 사람을 찾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부득이하게 가는 거라, 용건이 끝나면 부리나케 자리를 뜬다. 그런데 혼자 술을 먹을 땐 다르다. 밖에서 혼자 술을 먹으면서는 공부를 하는 것도, 영상을 보는 것도 어색하고, 혹시나 실수할지 모르니 카톡도 메일도 금물이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하기에 가장 적절한 활동은 오롯이 관찰하며 휴식하기이다. 아침 알람이 울린 순간부터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보내는 메시지까지, 깨어 있는 모든 순간 연결되어 있는 현대인에게는 희소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바텐더가 집중해서 얼음을 깎고 셰이커를 흔드는 모습을 멍하니 보는 것도 좋고,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봐도 좋다. 어차피 저들끼리 신이 나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염없이 있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주변이 서서히 흐릿해지면서 혼자만의 감상에 빠져들게 된다. 어디 숨어 있다 나왔는지, 불안감이 물밀듯 터져 나오기도 하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사람과 일에 대한 생각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불편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고 그러기엔 적잖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알코올과 흥 돋은 낯선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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