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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오에서이십육 Aug 29. 2021

퇴사 하려고요

암에 걸릴 줄 알았겠습니까

2021.04.26


작년 말, 일과 감정에 치여 미루고 미루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새벽에 남은 마지막 슬롯에 건강검진을 받아서 가까스로 벌금을 면할 수 있었다. 결과지에는, 뭐 다 좋은데 갑상선에 뭐가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한 줄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동네 병원을 갔더니 대학병원을 가라 하고, 대학병원을 가니 조직검사를 하자 하고, 조직검사를 해보니 검사 결과가 애매해서 다시 하자고 했다.


귓가에 '젊어서 그런지 피부가 왜 이리 안 뚫리는지...' 하는 의사 선생님의 서늘한 혼잣말과 함께 몇 번 목에 바늘이 꼽히는 경험을 하고, 갸우뚱하며 재검을 권하는 의사 선생님과의 짧은 면담을 몇 번 할 때까지만 해도 회사와 일정 조율이 귀찮았을 뿐 이게 뭐일 거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세 번째 조직검사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네... 암이 맞습니다. 그런데 갑상선암은 암 중에서도 예후가 좋아 전이율이 낮고, 완치율도 거의 100%에 가까운...'

뭐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고 엄마는 눈물을 훔치셨던 것 같은데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쳐간 생각들은 이 두 개뿐이었다.   

엥? 내가? 나 졸라 건강한데? 그것 참 예상치 못한 일이군.

와 씨, 퇴사나 할까?


병원 때문에 금쪽같은 반차를 쓴 게 아까워 이왕 나온 거 머리까지 하러 갔다.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가발제조 단체에 기부하려고 고이 기른 생머리 30cm를 잘라내면서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암 환자들을 위한 모발을 기부하고 있는 내가 암 환자다. 잠깐은 진지하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 머리를 아껴둬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그냥 웃어넘겼다.


게다가 그날은 하필 만우절이었다. 하루 전날에는 분위기가 좋아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그다음 날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나도 너를 좋아하지만 지금 만나는 여자 친구와는 헤어질 수가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했다.  3 안에 겪기에는 너무도 엽기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틀의 '황당함'이라는 표면적인 감정이 걷히고 나서는   복잡한 생각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전쟁터에 나가 현장을 담는 종군 사진기자, 10 시간 동안신경을 곤두세워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 밤을 지새워  좋은 서비스를 고민하는 창업가 ...  세상에는  고귀하고  수고로운 일들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달에 두세 번씩 야근을 하는, 고작 중소기업의 사무직 정도였던 나는 무슨 고생을 했다고  25세에 덜컥 암에 걸려버린 것일까. 어린 날의 나는 중요하고 바쁜 삶을 꿈꾸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정도의 일로도 아프면, 생각보다  능력이 내가 원하는 수준을  따라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


내가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열정은 어느 정도인가?

물론, 갑상선암은 암 중에서 제일 완치율도 높고 전이율도 낮다고 한다. 이렇다 할 증상도 없다. 수술해서 문제 부분을 절제해 내면 일상생활에 큰 지장 없이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일도 아니다. 수술 후 10년 내 생존율이 90%라고 하지만, 누가 20대에 10년 후 생존율을 고려하면서 사는가?


그래서 드는 억울함과 원망이라는 감정도 있었다. 갑자기 건강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변수임을, 사람 일이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나니 출처 모를 의무감에 떠밀려 아직도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고, 그마저 하고 싶은 것들은 미루고 있던 내가 미웠다. 요 근래 나를 힘들게 했던 회사가 미웠고 사람이 미웠다. 대체 무엇을 위해 나는 무엇인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기대하고 오늘 하고 싶은 것들을 부정하며 살아왔던 걸까.


원래부터 그랬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챈 건지, 암세포가 최근에 생긴 건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근 한 달 전부터 부쩍 피곤해지고 체중이 계속 줄어들긴 했다. 갑상선암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생활습관에 대해서 찾아보았는데, 특별히 하지 말라는 말은 없지만 6년째 지속한 채식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고 술도 당분간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포기해야 하는데, 회사는 여러 가지로 나를 너무 짜증 나게 했다. 그다음 월요일, 능력 없는 팀장이 팀 회의랍시고 매주 시작도 끝도 없는 개인 하소연을 늘어놓는 시간이 되었다. 그걸 듣다 보니 확신이 생겼다. 국가에 등록된 중증환자로 신분이 갱신된 나는, 이딴 걸 들어주고 있을 여유가 더 이상 없다. 20대 중반에 처음 좀 큰 병 걸려 봤다고 억울함에 눈이 돌아가서 한 이 결정이 초래할, 미래의 곤궁과 고용불안은 미래의 내가 스스로를 원망하며 책임을 지겠지.


밑도 끝도 대책도 없는 퇴사 결정이었지만, 이 강력한 한방으로 당시 연달아 닥친 유감스러운 사건들로 인한 지저분한 감정의 상처들을 덧나기 전에 소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퇴사 과정도 꽤나 우아했다. 회사에는 2주 말미만 주었기 때문에 좋았던 사람들만 압축적으로 만나서 좋은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이런 일에는 으레 있기 마련인 안 좋은 소문이 돌아 돌아 내 귀에 들어오거나, 내가 이미 잊혔다는 것을 내가 눈치챌 시간을 주지 않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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