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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재 Jan 12. 2022

‘나의 아저씨’ 그리고 <내가 유디티가 된 이유>

설악산 이야기 9 – ‘나의 아저씨그리고 <내가 유디티가  이유>



1. 이지안

그녀를 둘러싼 가난과 폭력은 지독하고 끈질겼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안은 어떤 희생도 감내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일까. 사채업자를 식칼로 살해했던 그 순간, 죽거나 죽이거나 양자의 택일만이 어느 10대 소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사채업자의 아들 광일이 아버지의 업을 물려받아 지안에게 채무 독촉을 빙자한 복수를 한다. 지안의 아르바이트 일당을 갈취하고 주거침입과 폭행을 일삼는다. 지옥은 끝나지 않는다.


2. 박동훈

그는 대표이사가 된 대학 후배 밑에서 고개를 조아려야만 한다. 퇴사할 수는 없다. 형도 동생도 백수다. 노모가 믿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 사이가 소원했던 아내는 하필이면 자신이 증오하는 후배와 바람이 났다. 아내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인간실격의 요조처럼 그는 무기력하다. 삶은 태생부터 지옥인 것만 같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그는 오늘도 묵묵히 시시포스의 바위를 정상으로 굴려 올린다.


3.

지안은 살면서 처음으로 어른다운 어른을 만났다. 삶의 한 줄기 희망을 봤다. 동훈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했다. 자기보다 더 시궁창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그를 향한 연민을 느꼈다. 어쩌면 사랑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동훈만큼은 몰랐으면 하고 바랐다. 광일은 지안이 살인자임을 동훈에게 폭로했다. 동훈은 이렇게 말했다. “나 같아도 죽였겠다.” 도청하던 지안은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4.

“내가 불쌍한가 보지?”

“너 불쌍해서 사주는 거 아냐. 내가 너보다 잘나서 사주는 것도 아니고.”

쓸쓸한 자들이 날카로운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공격은 최고의 수비라는 스포츠 격언은 조금 슬프게 들리기 시작한다.


5.

동훈이 포장해 쥐여준 음식을 할머니에게 먹여드리는 지안. 말을 못 하는 할머니는 너무 맛있어서 황송하다고 수화로 연거푸 말했다. 지안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던 그 순간 나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6.

광일의 아버지 기일. 광일이 지안의 집으로 찾아와 할머니에게 제사 음식을 억지로 먹이며 위협한다. 지안의 선택지는 여전했다. 죽거나, 죽이거나. 지안은 백화수복을 몰래 집어 들고 광일을 내려치려 한다. “어딜 애비랑 아들을 같은 날 제사 지내게 하려고 해?” 지안은 교복을 입고 식칼을 들어야만 했던 유년의 어느 날과 같은 모습으로 얻어맞는다. 대물림되는 폭력과 가난.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7.

만신창이가 되어 홀로 남은 지안은 주저앉아 녹음 파일을 듣는다. “착하다.” 동훈으로부터 난생처음 들었던 칭찬의 말을 살아야지 살아야지 다짐하듯 하염없이 반복해서 듣는다.


8.

내 삶을 다녀간 자들은 대개 가슴속 어딘가에 쓸쓸함을 품고 있었다. 지안의 미소 같은 기적을 약속하던 내게서 그들은 한 줄기 희망을 읽곤 했다. 서로를 품어 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우리는 위로 대신 상처를 주고받았다. 실망해서 떠나가던 자들의 한층 쓸쓸해진 뒷모습은 내 안에 미련이 되어 남아있다. 떠나간 자들의 빈자리에 또 다른 쓸쓸한 자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들었다. 찾아온 자들의 눈빛에서 나는 지나간 모든 자들의 눈빛을 발견하곤 했다. 언젠가 완전한 위로를 전할 수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어쩌면 떠나간 자들에 대한 그리움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9.

그렇게 격정적일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위로하면 그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를 살고 싶게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착하다.’ 나는 그 말보다 세련된 위로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유디티가 된 이유>는 그에 비해 한없이 투박하다. 나는 언제쯤 타인의 아픔을 세련되게 이해하는 어른이 될 수 있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나.


10.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다. 나의 언어로부터 희망을 읽는 자들이 있는 한 쉬지 말고 그들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사는가 싶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그들이 기적 같은 미소를 지을 때까지. 어쩌면 내 삶의 여정은 나의 이 투박한 위로의 언어를 ‘착하다’에 도달하게 하려는 일련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10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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