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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재 Jan 22. 2022

설악산 이야기 14. – 옆방 K에게 4


그의 나이 서른.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잠시 다녔던 성균관대 운동장에서 축구도 많이 했다고 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졸업하자마자 특성화고 전형으로 방송국에 취직했으나 고졸 출신의 유리천장을 느끼고 퇴사했다. UDT에 도전하려다 접었고, (남자들의 로망 ㅇㅇ) 여러 몸 쓰는 일을 하다가 현재는 3년째 소방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적인 성향의 그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여러 일을 하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공부를 이어 나가는 식으로 살아왔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무대에 오르기 위해 처절해야만 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지난 이십 대의 일대기에는 어디에도 의탁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자만이 가지는 특유의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축적된 외로움은 수험 생활로 인해 절정에 다다른 듯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의 지난날을 떠올렸다.


내가 택한 길이 남들과는 결이 다르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외로웠다. 학생회장 전형으로 대학에 가면 쉽게 들어갔을 것을 대학 가려고 학생회장 했냐는 그 소리를 듣기 싫어서 수능을 보기로 선택했을 때 외로웠다. 휴학하고 캠퍼스가 아닌 작은 과외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순례길을 걷고 내친김에 훈련소까지 걸어서 입대할 때도 외로웠다. 입대하면서 속세와의 연을 끊고 UDT가 되지 않으면 목숨도 끊겠다고 다짐했을 때도, 그래서 내 모든 나약함과 두려움을 박살 내며 진짜가 되기 위해 애쓰던 그 시절도 외로웠다. ‘웅지를 못 이루면 귀향 안 하리 / 부모의 슬하도 그리웁건만’ 내가 좋아했던 이 군가의 가사에는 당시 내 심정이 그대로 묻어 있다. 음악을 하겠다고 연습실에 처박혀서 흰 장갑을 끼고 새벽까지 피아노를 만질 때마다, 주말마다 진해에서 서울까지 도로에서 10시간씩 보낼 때마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다. 전역하고 영화를 하기 위해 사업을 시도하고 대리운전과 배달을 하며 고군분투하던 시절, 웅지를 못 이루면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를 독방에 가둔 채 외로움과 고립을 자처했다.


나는 나다워지려고 할 때마다 외로웠다. 그리고 K가 느끼는 외로움이 내가 지난날에 느꼈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마음이 같은 게 확인됐으면 그 순간부터 너와 나의 구분은 없어지는 것이다. 너는 그때부터 남이 아니라 너의 감정을 똑같이 느꼈던 지난날의 내가 되는 것이다.


그가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려줬다. 몇 년 만에 보는 영문법인데도 영구 기억이 된 것인지 그대로 기억났다. 1만 시간 이상의 과외 경력으로 나는 몇 번 대화를 나누면 그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귀신처럼 알아본다. 그가 쌓아온 지식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분명 고지가 코앞이었다. 시험이 석 달도 남지 않았지만 마무리만 잘하면 결과를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그에게 의지를 불어넣었다. 사실 모든 성취는 의지가 다 한다. 의지가 죽으면 끝이다. “네가 이번 시험에 붙을 수밖에 없다는 데 나의 손목을 걸겠다.”며 세게 이야기했다. 그는 분명 가능성이 있었고, 이를 실현하려면 먼저 본인이 확신해야만 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총알을 피하고 스미스 요원을 박살 낼 정도로 강해졌던 순간은 네오 자신이 네오임을 진실로 믿게 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람(人)은 서로 기대야만 사람이라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체온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면서 음악 테라피를 처방했다. 박창근 – 외로운 사람들.(이쯤에서 독자들은 어플을 켜고 이 노래를 촉촉하게 들어야 한다.)


다음 날 그는 운동복을 입고 신발끈을 조여 매고 있었다.

“뛰러 가게?”

“뛰어야죠.”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한 번 더 자기 자신과 싸워보려는 의지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되었음을 느꼈다.


이곳을 떠나는 날, 선물했던 나의 책 앞장에 적어준 “우리를 가라앉히는 것은 물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다.”라는 말 위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외로워야만 했던 지난날 나를 버티게 만들었던 한 문장을 덧붙여 적어줘야겠다. “연습실에서 비참할수록 무대에서 화려하다.”


그 한 줄을 눌러 적는 짧은 순간에 황석영 <개밥바라기 별>의 한 장면을 온 마음 다해 떠올리면서.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거기 씨팔은 왜 붙여요?”

“신나니까… 그냥 말하면 민숭맨숭하잖아.”


(1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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