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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재 Jan 23. 2022

설악산 이야기 15. 카리스마 터지는 주방장님께


(위 사진은 주방장님이 떠나실 때 선사한 롤링 페이퍼이다. 왜 ‘나의’를 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일러스트는 내가 직접 그린 것이다. 저것이 현재 내가 뽐낼 수 있는 가장 하이퍼리얼리즘적인 그림이다. 하하…)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초 하이퀄리티를 자랑하는 식사였다. (자기 자신과 ‘행복하게’ 대면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에 입소하기를 진심으로 추천한다…) 1식에 반찬이 최소 6가지가 나왔다. 비계와 껍데기가 적절히 어우러진 오겹살 부위로 만든 두루치기는 이곳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반찬이었다. 덕분에 급격히 살이 쪘고, 늘어난 몸무게에 비례해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관상을 얻게 됐다. 처음 며칠간은 주방장님과 마주칠 때마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요…”하고 거의 울먹거리다시피 하며 거듭 인사를 드리곤 했다. 여기가 무슨 군대 훈련소도 아니고 하루 종일 끼니때만 오매불망 기다리게 됐다. 이곳에서 주는 밥 먹으며 책만 읽으면서 영원히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방장님은 목소리가 걸걸하시고 카리스마가 넘치셨다. 아침마다 설악 3인조가 반찬을 다 털어가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등장해서는 면박을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멋쩍게 쳐다보며 “거봐 내가 뭐랬어. 뒷사람 좀 생각을 해야지 ㅉㅉ 하여튼 자기밖에 몰라요.” 하며 유치하게 서로에게 면피하기 바빴다. 그게 귀여우셨는지 주방장님은 웃음을 꾹 참으며 몸을 홱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시곤 했다.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빨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 듯했다.


우리는 옆방 K에게 첫 번째 판매(를 가장한 선물)를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이어서 주방장님과 사장님께 판매하기로 했다. 경제 바보인 우리는 이미 정이 들어버린 그들에게 차마 돈을 받고 판매할 수가 없었기에 이번에도 선물로 드리기로 했다. (이번 생에 돈 벌기는 글렀다.) 먼저 그분들의 소감을 듣고 힘을 얻어 나머지 투숙객들에게는 직접 찾아가서 방문판매를 시도하기로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분께 사인본을 전했다. 다음날, 우리는 주방장님이 분명히 날것의 소감을 들려주시리라는 기대를 가득 품고 식당으로 내려갔으나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태도였다. “역시나 공짜로 주면 가치를 못 느끼는 것인가…”하는 실의에 빠지려던 찰나, 갑자기 주방장님이 카리스마 넘치는 3콤보의 소감을 내뱉으셨다.


“독하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하하..)

“나 반성 많이 했어. 주변 사람들도 보여주고 싶었고. 살면서 이렇게까지 해봤는지.”

“앙꼬는 잘 지내?”


이제는 늠름해진 앙꼬의 최근 사진을 보여주고 사장님과 주방장님이 들려주시는 인생사를 경청했다. 60대 중년 여성으로부터도 일관된 반응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건 우리로서는 고무적인 결과였다. 그분들이 앞다투어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아들뻘인 우리에게 들려주는 모습에서 나는 이 책을 매개로 나이와 성별을 불문한 낯선 사람들과도 순식간에 내적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삼척 다이빙 샵에서 잠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분들은 조카뻘인 나에게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려주셨다. 내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 자신을 먼저 오픈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아쉽게도 주방장님은 가게를 오픈하기 위해 이곳을 떠난다고 하셨다. 그새 밥정이 들었는지 우리는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부담스러워하시리라는 의견으로 우리는 학창 시절에나 했을 법한 롤링 페이퍼로 대신하기로 했다. 이것을 좋아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롤링 페이퍼를 받아 든 주방장님은 “요즘에 이런 청년들 없는데…” 하며 고개를 잠시 수그렸고 우리의 핸드폰 번호를 먼저 물어보셨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음..음식은늘감사하는마음으로먹어야하는것은맞지만그리고어떤음식을갖다줘도잘먹기는하지만음.. 뭐랄까 더는 식사 시간이 기다려지지는 않게 되었다. 식사를 기피하는 일이 잦아졌다. 삶의 질과 행복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 더 오래 머무르지 않고 떠나기로 결정하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날  우리는 주린 배를 붙들고 오랜만에 배민 어플을 깔았다. 그리고 액정에 떠오른 ‘이라는 황량한 글자 앞에서 떠나간 주방장님을 그리워하며 한참이나 망연자실했다.


(16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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