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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재 Jan 24. 2022

설악산 이야기 16. 소녀 같은 사장님께


미소에서 선한 마음씨가 우러나와 존재만으로 주변을 환히 밝히는 사람이 있다. 사장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분을 ‘천사’라고 불렀다.


처음 왔을 때 방이 너무 추웠다. 사장님께 “방이 느므 추워요…”하고 말씀드리니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며 보일러를 만지고 동네방네 수소문해서 라디에이터를 구해 주셨다.


사장님은 고시원과 편의점을 함께 운영하시는데 우리가 편의점에 갈 때마다 도시락 등 폐기를 봉지 가득 챙겨 주셨다. 날짜가 남았는데 미리 폐기를 찍거나 유통기한이 반년은 더 남은 컵라면과 음료수를 주기도 하셨다. 이쯤 되면 폐기하기 위해 일부러 넉넉하게 발주 넣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장님이 1500원짜리 L사이즈 편의점 커피를 M사이즈 1200원 바코드로 티 안 나게 비껴 찍으시던 순간을 포착했을 때, 대체 이렇게까지 주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이 사람은 주는 기쁨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과 근심으로 잠을 못 잔 지 오래됐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나의 직감을 확신했다.


늘 주기만 하던 분께 받기만 하던 우리가 책을 팔 수는 없었다. 사달라고 얘기하면 무조건 사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책을 팔아 어떤 식으로든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이 다분한데 그것이 아닌 것처럼 전략을 짜는 우리의 모습이 우스워서였다. 그런 ‘전략적인’ 판매의 순간에 짓게 될 나의 비열한 미소에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벗어던지고 말 그대로 순수한 선물로 전하기로 했다. 주는 순간까지도 선물 이면에 담긴 마음이 저의 없는 순수한 마음인지 자신에게 끝없이 되물었다.


책을 읽고 사장님은 갑자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눈빛부터 달라요. 그 기운이 그대로 묻어 있어요. 그걸 좀 받아가야겠어.” 사장님은 자녀들이 자는 와중에 내 책을 손전등을 켜고 밤새 읽으셨다. 그 안에 담긴 웃음 지뢰 포인트에서 오랜만에 배가 찢어지도록 웃었다고도 하셨다. (작전이 먹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한참을 말씀하셨다. 가정사를 비롯한 인생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의 대서사시. 어떻게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갈 나에게 하루아침에 늘어놓게 된 것일까. 아마 누군가의 이해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순탄치 않았던 내 삶의 족적을 읽어 나가며 내가 자신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사장님은 책을 손님들에게 대신 팔아주겠다면서 남은 책을 전부 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선물을 포함한 보유분 7권을 10만 원에 모조리 구매했다. 분명히 주변에 파는 것이 아니라 선물할 사람이었다. 남은 책을 여기저기 들이대며 직접 팔아볼 계획이었던 우리는 순식간에 재고를 모두 처분했다.


순간 생각했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비열하게 팔았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결과는 같았을 수 있겠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선물로 주기로 했을 때 어쩌면 완판 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마음만은 지금처럼 편하고 떳떳했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디서 무얼 하든 비열해지지는 않기로 했다. 팔 것이면 사족이나 미사여구 없이 ‘나 이 책을 당신에게 팔겠소.’ 하는 것이다. 팔지 않을 것이면 ‘나 이 책을 당신에게 선물로 주겠소.’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과 닮아 있다. 세일즈 기법 등을 익혀 나갈 수도 있겠지만 테크닉이 주가 될 수는 없다. 사랑은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존재 자체다. 나는 포장되지 않은 나의 날것의 존재만으로 세상과 만나고 싶다. 그것만이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에.


우리는 떠나는 날 숙면에 도움이 되는 스페인 꿀차를 선물하기로 했다. 쫓기며 살 때마다 나의 삶에 여유와 사색의 틈을 소환하는 정채봉 시인의 <기도>를 눌러 적은 편지와 함께.


주려고 할수록 받게 되는 일을 자주 경험한다. 어쩌면 나는 그 부채감으로 인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고, 타인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약속, 헌신, 운명, 영원, 사랑 따위의 철없는 낱말들을 아직도 믿으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부디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뜻하지 않게 완판 한 기운을 모두에게 전하며 진실로 빈다.

(17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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