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가난했던 나의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하기 전까지 고기를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고기 맛을 몰랐던 아버지는 고기가 무서웠던 모양인지 엄마가 처음으로 제육볶음을 만들어줬을 때 절대 안 먹겠노라 버텼다. 그러다 억지로 한 점 집어먹었는데, 이게 기가 막힌 맛인 거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니. 이후 제육볶음은 아버지의 최애 메뉴가 되었다. 엄마는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돈도 안 벌어오는 놈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처먹지 않는다고. 그렇다. 뭐가 좋고 싫은지는 겪어봐야 안다. 고기를 먹어보지 않으면 고기가 내 취향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나도 아버지처럼 겁이 많았다. 경험해본 것이 적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난 저걸 싫어한다고 단정 짓곤 했다. 솔직히 그걸 좋아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가난은 괜히 사람을 쪼그라들게 한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가질 수 없어 불행해진다는 걸 어릴 때부터 체득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내가 조금씩 세상의 맛을 보기 시작한 건 연애를 하면서부터다. 가난하고 겁도 많은 놈이 어찌 연애를 했느냐 묻는다면 여자들이 날 가만두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어차피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너그럽게 넘어가자.) 어쨌든 스무 살이 넘어 첫 연애를 시작한 이래로 나는 쭉 ‘연애인’으로 살아왔다. 덕분에 혼자였다면 절대 가지 않을 곳에 가고, 먹지 않을 음식을 먹었다. 연애를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았다. 아,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이런 걸 싫어하는구나. 지금의 내 취향은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길러준 수많은(?) 여인들에게 감사를.
연애는 상대를 알아가는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상대를 통해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아, 내게 이런 면이 있구나. 상대에 따라 내가 어디까지 좋은 사람일 수 있는지, 어디까지 못나고 비열해질 수 있는지, 나조차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된다. 적나라한 자신을 만나는 경험은 썩 유쾌하지 않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악마랄까, 짐승이랄까, 아무튼 시커먼 무언가를 보았을 땐 솔직히 부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분명한 나의 일부니 환장할 노릇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게 된 소년의 이야기다. 도망칠 곳 없는 망망대해, 언제라도 날 찢어 죽일 수 있는 짐승과 한배를 탔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소년의 내면에 잠재된 본능, 잔인한 야수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년은 야수가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고 경계한다. 어떻게든 먹이를 구해 챙겨주고 규칙을 만드는 등 호랑이와 함께 지낼 방법을 배워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긴장감이 표류하는 소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소년은 금방 죽었을지도 모른다.
리처드 파커는 누구에게나 있다. 누군가가 너무 미울 때, 상대를 마구 비난하고 싶을 때, 미치도록 질투가 일어날 때. 그럴 때 나는 리처드 파커가 내는 “그르렁” 소리를 듣는다. 위험하다. 어서 달래주지 않으면 날 잡아먹을 게 분명하다. 달래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우선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조용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노트를 펼쳐 기분을 상세히 적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내면의 목소리를 찬찬히 듣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이유일 경우가 많다. 너무 유치해서 말하기 뭐할 정도다. 겨우 그까짓 이유로도 짐승은 깨어난다.
자,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면 다음은 맛있는 걸 먹을 차례다. 내가 주로 선택하는 메뉴는 고기다. 삼겹살이든 돼지갈비든 한우든, 불에 구운 고기는 언제나 옳다. 생각해 보면 짐승을 달래는 데 고기만 한 게 없지. 맛있는 고기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이해심이 넓어진달까, 혹은 귀찮아진달까. 사소한 인간사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진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고기를 안 먹어서 일지도 모른다. 고기는 주기적으로 먹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