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시절, 옆자리 친구의 얼굴을 그리는 수업이 있었다. 얼굴의 특징을 잘 잡아내 그림만 보고도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있게 표현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수업이었다.
시작! 미술 선생님의 구령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몸을 돌려 마주 보고, 서로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똑같이 그려주겠어. 비장한 마음을 품고 시작한 것이 분명한 침묵이 교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야, 눈이 삐었냐? 내가 이렇게 생겼다고?”
여기저기서 원망과 욕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들이 도화지 위에 창궐하고 있었다. 평소 그림 좀 그린다고 자부하던 나 역시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망작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미술 선생님은 웃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예견이나 했다는 듯이. 아아, 정녕 우리 반엔 이 미션을 성공할 이가 하나도 없는 것인가.
“우와, 똑같다!”
그때였다. 반의 한구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보았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단박에 누구의 얼굴인지 안 것은 당연한 일, 단지 그것뿐이라면 혁명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을 거다. 그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그림은 측면이었다. 완벽한 ‘옆모습’ 말이다.
에이, 그게 무슨 혁명이야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그려도 되는구나!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당연히 정면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 단 한 명, 그 녀석만이 측면을 그렸다. 친구의 얼굴을 닮게 그리라고만 했지 정면을 그려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다. 그런데도 왜 당연히 정면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옆면을 그리다니, 이건 편법이야!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은 정면을 그린다. 눈, 코, 입이 다 나오도록 정면에서 그리는 것이 아무래도 맞는 방법 같아서다. 하지만 옆에서 본 얼굴도 분명 얼굴이고, 정면에선 보이지 않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얼굴이 드러나기까지 하니 어찌 잘못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가.
그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 사실 정면에서 본 얼굴을 그린다는 건 쉽지 않다. 들어가고 나온 이목구비의 굴곡이 평평하게 보이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반면 측면에서 얼굴을 보면 얼굴의 굴곡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마와 코, 입술로 떨어지는 외곽선을 잘 따라 그리기만 하면 하나의 선으로도 그 사람의 특징을 쉽게 잡아낼 수 있다. 그런 효율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쉽게 한 명을 그려내고 내친김에 다른 친구의 얼굴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뚝딱뚝딱 서너 명의 옆얼굴을 그 인물과 똑 닮게 그려냈다. 아! 그날 난 측면을 다시 보게 됐다. 정면만이 어떤 이의 얼굴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나야말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게 아닐까.
정면만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들의 옆얼굴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거나 멍하니 있는 옆얼굴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이 사람,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수없이 봐온 사람임에도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옆얼굴엔 그(그녀)의 이면이랄까 본모습이랄까, 전혀 다른 얼굴이 있다. 정면에선 보이지 않던 슬픔이나 매력, 혹은 말 못할 비밀. 그에게도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고 놀란다. 그런 이유로, 한쪽 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될 일이다.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볼 때도.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정면으로 내세울 게 없으니 자꾸 측면 운운하는 것이 아니냐고. 빙고! 나는 정면이 별로다. 정면을 잘 그리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잘 안 됐다. 내게 다시 기회가 온다면. 다시 내 얼굴을 그릴 기회가 온다면 이번엔 측면을 그려볼 생각이다. 남들과는 다른 방향, 내가 잘 그릴 수 있고 좀 더 나다운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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