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완 May 13. 2019

타협의 기술





대학 수강 신청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다 신청 페이지가 열리기 무섭게 클릭을 하는데도 원하는 교양수업은 언제나 만석. 와 씨! 도대체 얼마나 빨리 클릭을 해야 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거냐. 비싼 등록금 내는데 듣고 싶은 강의 하나 못 듣는 이 더러운 세상! 화가 치밀어 욕을 하는 사이 다른 수업들도 줄줄이 마감, 마감, 마감. 결국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찌끄레기(?)만이 내게 허락되곤 했다.

이런 수업을 많이 들었다. 내 의지로는 절대 듣지 않았을 수업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수업들이 내 인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수강 신청 전쟁에서 패배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내게 큰 영향을 준 몇몇 교양수업 중 ‘도덕의 이해’라는 수업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강의 제목만 봐도 정말 재미없을 것 같지 않은가? 실제 수업은 더 재미없다. 그럼에도 이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수업은 주로 토론과 발표로 이루어졌다. 교수님은 주제만 던져주고 뒷짐을 진 채 학생들의 토론을 지켜보기만 했는데 교수 입장에서야 완전 날로 먹는 수업이었지만 학생 입장에선 어색해 죽을 맛이었다. 한국 학생들은 토론에 익숙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교수님.

하루는 ‘난민’ 문제에 대해 토론을 했다. 최근에도 난민 문제가 큰 이슈지만 십여 년 전에도 그랬다. 그때의 대한민국은 난민 문제와 멀리 떨어진 나라라는 점이 차이였다. 난민 문제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만약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찾아온다면 어떡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토론을 했다. 우선 난민을 받아야 한다는 측과 받아선 안 된다는 측으로 나눠 각자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중립은 없었다. 그건 교수님의 원칙이었는데 반대 아니면 찬성,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면 그 선택에 합당한 근거와 논리를 대며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난 난민 문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일단 ‘반대’ 편에 섰다. 난민들 사정이 딱한 건 알겠는데 왜 우리나라 세금으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 한 두 명 받아주다 보면 여기저기서 다 몰려올 텐데 그거 다 감당할 수 있냐, 그러니 애초에 받아선 안 된다는 게 우리 쪽 주장이었다. 상대편에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받지 않으면 오갈 데 없어 죽을 것이 뻔한데 어찌 내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토론이 계속될수록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마치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경기 같았다. 여기서 밀리면 안 돼. 급기야 나는 상대측에게 ‘현실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착한 사람이고자 하는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된 관계로 토론은 거기서 끝이 났다. 어떤 결론도 없이. 그 수업은 늘 그런 식이었다. 싸움만 실컷 하고 결론은 없었다. 그런 열린 결말은 화장실서 큰일을 보고 뒤를 닦지 않은 듯한 찝찝함을 남겼다. 뭣 하러 싸운 거야? 그 시간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언젠가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바다 위를 떠돌다 보트 위에서 죽은 난민들의 사진을 보고 안타까워 눈물을 글썽였던 나였다. 나 스스로가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결국 수업 시간에 내가 주장한 것은 우리가 손해를 보게 되니 저들이 그렇게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얘기였다. 주장의 타당성을 떠나 그런 생각을 가진 나 자신이 너무 별로였다. 생명이 귀하다고 말하면서 ‘우리’ 생명과 ‘남’의 생명을 가르는 그 이기심이 어디서 오는 건지 의아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민을 수용하는 것은 또 아닌 것 같고. 아아, 답이 없다. 그나저나 나는 왜 그렇게까지 열을 내며 상대편을 비난했을까. 상대의 마음도 분명 내 안에 있는 것인데. 이기고… 싶었던 걸까.


일주일이 지나 다시 수업 시간이 됐을 때, 마침 나는 앞에 나가 발표를 해야 했다. 발표에 앞서 나는 사과를 했다. 지난번 토론에서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해서. 난민 문제는 단순히 현실적인 이익이나 손해만을 생각할 문제는 아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당장 난민 수용에 찬성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누가 옳고 그른가, 누구의 말이 더 타당한가를 따져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문제가 아닌 것 같고요.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해야 할 문제인데 내 주장만이 옳고 너는 틀렸다는 자세는 도움이 안 되겠다 생각이 들어 많이 반성했습니다. 이 수업은 결론이나 상대를 설득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한 게 아니라 이걸 알려 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교수님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A 학점을 받겠구나. (웃음)

실제로 나는 그 수업에서 A 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점수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내 학점은 이미 개판이었고 학점 따위는 별 상관없었다. 나는 진심이었다.


그 이후로도 토론은 계속되었다.

낙태, 간통죄, 안락사, 자살, 사형제도……. 많은 이슈에 대해 찬반으로 나뉘어 토론을 이어갔다. 여전히 답도 없고 결론이 안 나는 문제들. 흔히 ‘도덕’이나 ‘상식’은 절대적이고 고정적이라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을 배웠다. 어제의 도덕이 오늘의 부도덕일 수 있고, 여기에서의 상식이 다른 곳에선 몰상식일 수 있다. 개인은 어떠한가. 흔히 우리는 내 생각이 상식이라 생각한다. 내가 보통의 기준이며 일반적인 생각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분명 나는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별종이다. 너무나 많은 생각과 생각, 이해와 이해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전장이 우리의 삶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인류의 평화 따위를 걱정하기엔 난 너무 이기적인 인간이므로 그냥 나 하나 잘 살면 그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론 수업은 분명 내 인생을 나아지게 만들었다. 나는 호불호가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라 논쟁을 하면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심지어 연애하다 싸움이 나면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람이었다(아아, 적고 보니 정말 별로다). 그런데 그 수업 이후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웬만해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됐고 남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갈등 상황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화해하고 관계를 기분 좋게 이어갈 것인가가 주된 관심이 되었다. 덕분에 사람들과 싸움을 잘 안 하게 됐다. 인간관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할까.

한때 인생은 끝없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인내하고, 한계까지 나를 밀어붙이고, 뭔가를 극복해서 승리를 거머쥐는. 뭐 대충 그런 게 인생이라 여겼다. 이제는 싸우지 않기로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다. 인생의 커다란 문제들은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맘에 안 들고 답도 없는 이 인생과 잘 지낼 수 있나 고민할 뿐. 이기려고 사는 거 아니지 않나(도대체 누구를 이긴다는 겁니까?). 나는 그저 잘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이 못난 인생과 타협하며 잘 지내보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