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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Sep 04. 2019

특별한 삶




 오래전 읽었던 소설을 다시 꺼내 읽다가 책장 사이에 꽂혀있는 영화표를 발견했다.


 다 큰 여자들

 2009-10-11(일) 6회 19:00

 B층 2관 54번 8,000원 씨네큐브


 영화를 보고 난 후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 삼아 꽂아둔 모양이었다. 십 년 전의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이 영화를 보았구나. 2009년 10월 11일 저녁 광화문의 한 극장에, 내가 있었구나. 완전히 잊혔던 과거 한 시점의 내 모습이 박제된 채 거기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금의 나는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분명 내가 본 것이 맞을 이 영화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았다. 줄거리도 읽어보고, 스틸컷도 살펴보고, 예고편까지 봤지만 너무 생소했다.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까진 기억이 나는데 영화의 어떤 부분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더럽게 재미없었거나 인상적인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던 모양이다. 놀랍지 않다. 그 시절 나는 이런 재미없는 영화들을 많이 봤고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변태가 아닌 이상 재미없는 영화를 좋아할 리는 없고, 남들이 잘 보지 않는 영화를 찾아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엔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극장들이 꽤 있었다. 그런 극장을 돌며 독특한 영화를 보는 게 내 취미라면 취미였다. 비주류 영화를 본다는 건 일종의 도박과도 같다. 가끔은 이런 좋은 영화를 사람들이 모른다니 안타깝다 싶을 정도의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뭘 본 건지도 모르는 채 극장을 나오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나의 수준이 따라가지 못한 탓도 있다. 아무튼.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비주류 영화를 보는 것은 내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나 자체가 비주류라 더욱 애착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2006년의 어느 날, 뭐 볼 만한 영화가 없나 종로에 있는 '씨네코아'에 들렀더랬다. 상영작 중에 특이한 제목을 발견하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이요."

 돈을 지불하려 하자 점원이 말했다.

 "공짜예요."

 "네?"

 오늘이 마지막 상영이라고 했다. 이제 극장이 문을 닫는다고. 마지막은 무료 상영이라고 했다. 항상 주머니가 가볍던 시절이었다. 공짜표를 얻었으니 기뻐 날뛰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서운했다. 이제 다시는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없음이. 이곳에서의 추억이 참으로 많은데…… 이렇게 이별이구나. 오, 나의 씨네코아. 코아아트홀이 사라질 때도 슬펐는데 너마저.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라 운명처럼 느껴졌다. 극장이 내게 작별인사를 건네려는 것일까.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런 영화를 만난다는 건 일종의 행운이다. 많이 울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헤어진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지만 울림이 컸다. 내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뒷모습'으로 기억되는 영화다. 이별 후 남겨진 이의 뒷모습을 이토록 담담하게. 그래서 더 슬픈. 이별 후에도 우리는 살아가고, 살아가야만 한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의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마지막 상영으로 무슨 영화를 골라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골랐다고. 그동안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담담한 인사를 건넸다. 관객들은 박수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자리가 마무리되고도 나는 오랫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혼자 남아 살아갈 조제가 눈에 밟혀서인지, 사라지는 극장이 아쉬워서인지, 아니면 오래된 연인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한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내 안의 무언가와 이별을 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내가 즐겨 찾던 극장들은 거의 사라졌다. 나는 갈 곳을 잃었고 더 이상 독특한 영화를 찾지 않게 되었다.


 내가 독특한 영화들을 즐겨 찾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어느 정도의 허영심도 있었다는 걸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남들과는 다른 취향을 가진다는 것, 남들이 모르는 영화를 안다는 것. 그런 것들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었다. 차이밍량, 이마무라 쇼헤이, 페드로 알모도바르, 프랑소와 오종……. 이름도 낯선 타국의 감독들 영화에 열광했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다. 나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져 좋았다. 허세였다. 착각이었고. 물론 그들의 영화는 끝내주게 좋았지만 내 취향의 이면엔 '특별'하고픈 욕망이 더 컸던 것 같다. 영화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옷도 다르게 입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책을 읽었다. 유행하는 것은 일부러 피했다. 그러면 특별해지는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의문도 생겼다. 내가 이걸 진짜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남들은 안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걸까 하고.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사실은 그런 것들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거다.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언제나 특별하길 원했고 그렇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세상은 내가 특별하지 않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되새겨주곤 했다. 처음엔 인정하기 힘들지만 이리저리 부딪히며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자연스레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고도 살아가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다. 꿈꾸던 아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제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들과 다른 부분은 숨기고 튀지 않게 살아가려 애를 쓴다. 이렇게 변한 내가 좋기도 하고, 한편으론 슬프기도 하다. 나는 평범한 사람. 평범하게 살아가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평범하게 산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남들만큼 하고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니 저절로 특별한 삶이 됐다고 할까. 미세한 각도로 틀어진 평행선이 시간의 흐름에 점점 더 벌어지듯, 전혀 다른 방향의 인생이 돼버렸다. 이제는 평범하고 싶다고!

 어차피 나는 평범하게 살긴 그른 모양이다. 결국 내가 즐겨보던 영화들과 닮은꼴이다. 특별하긴 한데 흥행은 못할 비주류. 그런 영화들을 보는 게 아니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지만 다시 볼 수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너무 슬퍼서 다시 보는 것이 두렵다. 무릎이 꺾인 채 오열하는 '츠네오'와 생선을 구운 후 쿵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는 '조제'의 뒷모습이, 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다. 아, 물고기 모텔에서의 그 쓸쓸한 독백도. 나에겐 여러 의미로 특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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