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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닥터 Feb 13. 2021

삶의 공포와 리차드 파커

여전히 자살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자살의 원인으로 우울증을 가리키는 것은 맞으나 공포와 불안을 더 우선한 원인심리로 생각해보아야할 것 같다.

두려움이 자신을 죽이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2102 이 안 감독>를 잠깐 읽어보겠다.

영화는 스토리를 찾아헤메던 한 소설가가 어떤 인도남자를 만나 실화를 듣게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파이(π)’라는 인도소년이었던 그의 경험담을.  π는 흰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신앙을 통해 절대자인 神을 찾아 왔다. 합리적인 이성주의자인 아버지는 logos(이성)가 삶의 최우선 신조가 되어야 한다며 파이를 걱정해 왔다. 만물에 神이 내재하기에 호랑이의 눈에서도 神을 보고 싶다며 이 영성이 충만한 소년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를 들고 리처드파커를 찾아 간다. 리처드는 동물원의 호랑이다. ‘리처드 파커’란 사냥꾼이 물을 마시러 온 새끼 호랑이를 포획하여 ’목마른 이‘라 이름 지었었다. 팔게 되었을 때 담당 직원이 실수하여 이름을 바꿔 적었다. 그 이후 뱅골産 호랑이는 ’리처드 파커‘가 되었고 겁 없는 소년을 코앞에서 보게 된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급히 달려와 막지 않았으면 π는 목숨이나 팔을 잃었을 것이다. 기가 막힌 아버지는 염소를 끌고 와 리처드 앞에 놓아두니 그는 먹잇감의 숨통을 끊으며 끌고 돌아갔다. 이를 본 π는 차가운 이성의 힘이 마음을 지배하며 열정이 식은 건조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쨌든 π는 로고스적인 아버지와 신을 경배하며 자신을 응원하는 어머니, 이렇게 이성과 영성의 두 축으로 성장한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정부의 지원이 막히자 가족과 동물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주를 결정하였다. 캐나다로 가던 여객선은 폭풍을 만나 π가족과 수많은 사람을 안고 바다 밑으로 사라진다. 구명보트에 자신과 동물원의 호랑이(리처드 파커), 어미 오랑우탄, 하이에나,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이 타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해쳤고 리차드 파커는 그 하이에나를 진압하며 모두 잡아먹었다고 하였다. 이 뱅골호랑이와 자신이 사투를 벌이며 같이 표류하여 400여일 만에 멕시코 해안가에 발을 딛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황당하다며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다른 내용을 말하였다. 구명보트에 탄 것은 자신과 어머니, 탐욕스런 요리사, 다리가 부러진 선원, 불교도였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여 요리사를 시체를 먹으며 π 혼자 살아남았다고 하였다.


당신은 두 개 중 어떤 것을 믿고 싶은지 π와 영화는 묻는다.

합리적인 현실과 비합리적인 믿음의 두 이야기는 어쩌면 모두 진실일수도 있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리처드파커가 없었다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π는 토로했다. 그 망망대해에서 호랑이가 주는 공포가 오히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성을 발휘하며 처절하게 살아남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고통이 큰 의미로 작용한 것이다. 파이가 절규한 바다와 폭풍, 죽음과 호랑이는 지옥처럼 힘든 난관이면서 깨달음과 구원의 통과의례였다.

π는 그 지옥에서 神의 존재를 체험하였다. 아직 노란 불빛을 발하며 해저로 침몰하는 배의 모습은 두렵고 신비로우며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은 고요한바다와 폭풍의 바다, 수많은 해파리가 빛을 발할 때 향유고래가 뛰어 오르는 장면, 굶어 죽기 전에 우연히 날아든 날치 떼, 먹구름을 가르며 비치는 성스러운 햇살에 이르기까지 π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통해 누멘(Numen)적 체험을 한 것이다. 고요한 밤에 리처드와 같이 바다 속을 가만히 바라보다 우주 만물과 부모님 등 모든 것이 하나가 되며 영겁의 시간을 뛰어 넘는 전체성을 경험하였고 리처드와 영적교감까지 하였다. 비록 그는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神에게 “다 뺏어가고 무엇을 더 바라냐”고 분노의 절규를 터뜨리지만 구원의 열망도 포함 된 神聖의 비합리적인 체험을 한 것이다. 종교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聖顯(성스러움의 발현)은 일상에서 나타나야 의미가 있다, 고 하였다. 평범한 돌멩이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남다른 의미가 스며든다는 뜻이다. 지옥의 땅에 사는 것일 수도 있는 우리에게 성스러움은 하늘의 이데아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주관적 경험이어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리라.
 
댓글과 말에 상처 받으며 세상 속으로 나아갈 용기를 잃은 분에게는 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극심한 공포가 그대의 배에 뛰어들어 삶을 뒤흔들어도 이 소년처럼 정신을 잃지 말자고. 이성적으로 하나씩 대처하다보면 그 단순무식한 맹수를 다루고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삶의 회의로 무기력한 노인이나 직장인이 神의 은혜는 받은 것이 없고 그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난 공감할 것이다.

사실 300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고의 참담함 앞에 神의 존재를 믿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이성을 중심에 둔 채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던 소년의 이야기는 해드리고 싶다.
일상에서 비합리적인 성현을 체험하는 것은 평범한 경우는 아니지 않다고 하실 수도 있겠다.

당신 안에 있는 거룩한 힘이 바로 성스러움이라고 난 말할 것이다.

27년간 정신과 의사 일을 하면서 100% 이기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편협하고 잔인한 언행을 쏟아내는 사람일지라도 측은지심이 있더라.

오랫동안 참으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많은 일생을 살고 있는 이들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삶의 희망이 바닥나고 죽음이 휴식이라 여기게 된다면 조금만 더 견디어보라고 간곡히 부탁드릴 것이다. 그대가 언젠가 베풀어준 그 거룩한 배려나 성의가 이제 그대에게 다시 살게 해줄 그 무엇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스무 살을 살아보지 않고 내일을 포기하려는 소년이나 새로운 배로 출항하는 청년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마 꼭 그렇겠지만 너의 배에 리처드파커가 느닷없이 올라타서 잡아먹히거나 바다로 떨어질 위기에 처할 것이다.

스스로 무너지거나 남이 너를 공격하듯이 자책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호랑이의 무서운 눈과 이빨을 참아내면 맹수의 에너지를 네 것으로 하여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혹시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행운을 누린다면 ’지금 살아 있음‘의 광휘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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