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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닥터 Feb 14. 2021

그대 사라지지 마라

2020 가을에 씀

밤새 창가를 서성이던 달빛과 귀뚜라미 소리는 서리를 남기고 물러가고 청명한 가을 하늘은 햇살에 반짝인다. 그 아래 단풍의 향연이 펼쳐진다. 출근하며 이슬에 젖은 낙엽 위의 주단 길을 걷는다. 퇴근길에는 바스락거리는 산책길이다. 소슬바람이 느티나무 잎들을 연주하는 경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버드나무 잎사귀도 물들어간다. 여름의 기운이 깃든 녹색에서 노랗게, 빨갛게 찬 서리로 익어가는 수채화에 시선이 머문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귀족이라면 버드나무는 서민이다. 달빛 아래 그를 보노라면 적우의 ‘가을편지’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 또 마음이 공허해지고 다 의미가 없게 느껴지고 쓸쓸해요. 이때가 되면 꼭 이러네요. "
진료실에서 듣게 되는 가을의 또 다른 소리이다. 이는 고통스런 토로이다. 가을에 2주 이상 우울감이 지속되고 의욕과 식욕이 저하되며 무력감을 느낀다면 잠깐 가을을 타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일 수 있다. 이미 우울증이 와 있었고 가을이 알람을 울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산과 들로 오색정취를 즐기는 가을에는 우울증 환자도 크게 늘어난다. 스스로 생을 접는 안타까운 일이 가장 많은 계절이다.

십대의 우울증은 감정기복이 너울 치는 모습이다. 멀쩡한 듯 깔깔 웃다가 혼자되어 자해를 하는 격렬한 우울증이다.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고된 학습을 견뎌내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는 피 말리는 시간일수도 있다. 20,30대 청년의 우울증은 사회적응의 반응성우울로서 좌절로 인한 것이다. 취업과 승진의 고난에 대한 마음의 비명이다. 40,50대 중년의 우울은 열심히 살아가다 새겨진 상처를 이제야 느끼며 후회하며 공허해지는 것이다. 이젠 해가 비치지 않는 골짜기의 서늘한 바람이 허전한 마음을 할퀸다. 60대 장년의 우울은 그 연장선으로 몸과 마음이 이전 같지 않고 삶의 정점에서 내려오는 설움과 자괴감이다.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길어진 수명이기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전환의 고민이 담긴 우울이기도 할 것이다. 70대 이후의 노년의 우울증은 쇠락해진 몸을 몇 개의 약으로 버티며 무대 뒤 찾지 않는 방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모습 같다.

십대와 청년의 우울은 기성세대의 지원과 스스로의 열정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고 말 것이기에 과도기적인 것이다. 가을 무렵에 더 걱정되는 것은 중년이후의 우울증이다. 화려한 색을 수놓지만 건조해져 떨어지고야 마는 잎사귀의 앙상한 나무처럼 하얀 겨울을 견디어야 하는 그들은 쓸쓸하고 위태롭다.

우울한 그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해본 적 있는가? 부모와 연인과 자식을 사랑하였지만, 자신을 정성껏 돌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제는 거울 속의 그 사람, 자신을 귀하게 여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대충 먹지 말고 좋고 건강한 음식을 차려주자. 매일 하루를 선물하듯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가장 멋진 모습을 연출하며 시작하자.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나를 귀하게 여기는 첫걸음이다. 다정한 듯하지만, 당신을 뒷담화 하는 이들을 이제 보지 말자.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봐 마음 졸이며 관계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습관은 이제 휴지통에 버리라. 가족에 희생하며 보이지 않게 치워두었던 그대의 소망을 이루는 것에도 모자라는 시간이다. 

그대가 알게 모르게 지나쳐갔던 위험했던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러기에 지금 살아있음은 기적이다. "이제 저를 가장 우선순위로 위해주기로 했어요. 혼자 놀기도 잘하고 사람들의 말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니 얼마나 편한지요. 원장님 조언대로 나를 비난하지 않고 엄마가 나를 눈부시게 바라봐 주었던 그때처럼 저를 보기로 했어요. “
詩人 박노해는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마라.' 고 했다. 어린잎이든 퇴색한 마지막 잎사귀이든 앙상한 나무이든 그 뿌리에는 귀한 생명의 수맥이 뛰고 있다. 이 가을 당신의 마음은 익어가고 빛나게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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