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은 바가 꼭 사실이어야만 좋은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보통 우리가 믿는 바가 진실이기를 바란다."
가장 보편적인 예는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방이 "내가 믿는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또 다른 익숙한 예는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정치인이 "내가 믿는 그런 철학을 갖고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이 밖에도 종교, 커뮤니티 등 생각해볼 수 있는 예는 셀 수 없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이 진실이기를 바라는 것인지는 햇갈리지만 늘 그렇게 산다. "어떠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우리 어머니는 암에 걸려 돌아가셨다.
그것도 매우 예후가 좋지 않은 암이라서 그 암을 갖고있는 환자와 보호자가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에서 글을 읽고나면 앉은 자리에 살짝 걸친 다리 힘 마저 빠져버릴 정도로 부정적인 기운에 가득찼다.
그 때 나는 느꼈다. 분명 커뮤니티에서 읽은 글의 95%는 좋지 못한 결과를 맞이한 사람들이 적은 글이었는데, 내가 스마트폰에 저장한 글은 나머지 5%가 쓴 글들이었다. 그 글들은 평균 생존기간보다 오래 산 사람들이 쓴 글이었고 나는 그 글들만 집중적으로 정독했었다. 간혹 머리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하는 통계 따위는 그럴 때마다 머리속의 저 구석 뒤로 밀어넣은 상태였다.
이후 내가 취한 행동들 역시 별로 이성적이지는 못했다. 긍정적인 5%의 글에서 나온 암에 좋다는 재료들을 구매했고, 그 환자들이 먹었다는 자연식품들만 먹기를 어머니에게 강요했다. 분명 정규분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돌아가신 분 들도 그런 재료들을 먹었다는 글을 보았었는데, 즉 통계적으로 통상 이용하는 P-Value를 계산해 보았으면 전혀 유의미함을 찾을 수 없었을텐데 이미 내 믿음은 내 행동을 통제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보다 나에게 더 솔직할 수 있다. 당시 나는 그렇게 믿는다기 보다, 내가 믿고자 하는 바가 진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회사를 경영하는 기업가다. 이론적으로 경영자는 매번 확률적 기대값이 높은 선택을 해야한다."
그 말은 내가 어머니의 병을 바라보던 것과 같은 시각으로 경영을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믿는 바가 확률이 낮다면 나는 그것을 무시해야 한다. 그리고 확률이 높은 선택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경영학에서 존경받는 경영인들은 높은 확률의 선택에만 베팅을 해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산업에서 이름을 남긴 경영자들은 항상 낮은 확률의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들이었다.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우리가 손 꼽는 스티브잡스, 제프 베조스, 일론머스크, 정주영 등 모두 높은 확률의 게임을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너무 웃기는 사실이다.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해 지식을 전달하는 경영학 교육을 하면서 성공의 아이콘들은 늘 이에 반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는 이들이 성공한 이유를 찾기위해 그들의 긍정적인 점들만 찾아내서 적절한 이유를 붙인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과감한 베팅을 해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경영자가 더 많을 것이다.
비유하면 사회는 동일한 방법을 취했어도 돌아가신 커뮤니티의 95%는 무시하고 살아남은 5%가 취한 행동에만 집중했던 그 때의 나와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잠깐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내가 나머지 95%의 글들에 집중했으면 무엇이 더 좋아졌을까...............?
달리 말해 내가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면 무엇이 더 좋아졌을까..............?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사례는 기적의 사례는 되지 못했지만 나는 어머니가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갖고 어머니에게 좋을 것을 드리고, 엔돌핀을 위해 어머니를 웃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공기 좋은 곳으로 모시러 다니고 했던 시간들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믿기 보다는 내 믿음이 맞기를 바라고 행동했던 것이지만, 그 행동은 내가 이후 가질 수 있는 후회를 덜어주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믿은 바가 꼭 사실이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믿은대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인생 전반에 더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다. 설사 그 믿음이 틀렸더라도.
사회물을 점점 먹으며 "생일" 을 점점 덜 특별하게 보내고 있다.
예전과 같은 생일파티나 모임도 없고, 그냥 평소와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여 하루를 마감한다.
이번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자정까지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끈 후 피곤한 상태로 생일을 맞이한 후 잠에 들었다.
잠에 들기 전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예전 사진들을 보고 자서 그런지 생일에 꾼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꿈에서 암으로 의식없이 누워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나시더니 내 이름을 부르고 안아주셨다.
꿈에서 어머니를 안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꿈에서 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분명 내가 나을꺼라고 이야기했자나!"
그리고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시고 나를 안아주며 이야기하셨다.
"그래 승훈아, 니가 말한대로 엄마가 나았어! 엄마 이제 나았어!"
아침에 일어난 후 피식 웃으며 생일이라 내가 올해 돌아가신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었나했다.
그런데 생일날 먼 공장에서 미팅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어머니가 생일이라서 꿈에 나타나셨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내가 참 마음속으로 염원했던 장면이구나 싶었다.
다시 글의 주제로 돌아와서 내가 하고 싶었던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믿음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을 위해 사는 것 자체,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가?
Written by 신승훈
2021-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