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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chelspick Jun 11. 2022

베트남에서 워킹맘으로 살기 (1) 엄마 혼자 호찌민으로

2018년 7월 30일  홀로 호찌민 공항에 내렸던 날을 기억합니다.

베트남에는 한국인이 꽤 많습니다. 통계자료를 찾아봤습니다. 2021년 외교부가 발행한 재외동포 현황에 따르면 베트남에 거주하는 재외동포 한인은 매년 증가하여, 2015년 10만 8,850명에서 2021년 15만 6,330명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베트남으로 이주한 것은 2018년 말이니, 아마도 2018년과 2019년 통계가 올라가는데 한몫을 했겠네요.


<대한민국 외교부 재외동포 현황 (2021)>

(단위: 명)

자료: 대한민국 외교부 재외동포 현황 (2021.12.24)

https://www.mofa.go.kr/www/brd/m_4075/view.do?seq=368682


왜 친척도, 집도 절도 없는 베트남으로 갔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베트남에 사업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베트남에 투자를 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베트남으로 이주하는 한인들은 직장 때문에, 또는 사업을 하러 이주합니다. 저희도 둘 중에 하나이긴 했습니다만, 케이스가 매우 달랐습니다. 아빠 직장 때문에 베트남에 온 게 아니라 엄마 직장 때문에 온 거거든요. 평생직장도 아니었고, 모든 것을 다 대주는 대기업도 아니었습니다.


약 9년간 재직하던 직장에서 베트남 자회사에 근무할 직원을 모집했고, 겨우 4살 배기 딸이 있는 제가 지원해서 뽑힐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2018년에 저는 서울에서 토플 강사를 하고 있었고, 시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대구에서 일하고 있었고, 주말부부로 살고 있었기에, 당연히 가족들은 제가 호찌민으로 일하러 가는 것에 대해 걱정이 컸죠. 호찌민에 있는 자회사에서는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외국인 강사들을 교육하는 ESL 프로그램 R&D 매니저로 일 할 참이었습니다.


그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셨던 것은 형님입니다. "가족들은 각자 자기 살길 마련해서 알아서 잘 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그게 건강하고 남에게 폐 덜 끼치는 거야. 가서 아이들 교육시키기 좋은지 알아보고, 괜찮으면 다 같이 가. 내가 힘이 되어줄게."


형님께서 시어머님을 설득해주신 덕분에, 2018년 3월에 해외근무에 지원했고, 5월에 최종 합격을 했고, 6월 말까지 기존 직장에서 근무를 하고, 대구로 내려가 가족들과 약 3주간 시간을 보내다가, 7월 30일 호찌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당시 약 36개월 남짓 되었던 외동딸은 엄마가 어디로 가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지원했던 가족사진 촬영 이벤트에 당첨되어, 온 가족은 제가 출국하는 전날, 하남에 있는 스튜디오로 가서 시부모님의 리마인드 웨딩사진 겸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후에는 스타필드 하남에 가서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아버님께서는 대구로 내려가시고, 어머님, 남편, 딸과는 인천 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하남 스타필드 근처 GU스튜디오에서 찍은 시부모님 리마인드 웨딩 사진 (2018.7.29)


새벽 4시가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딸아이를 깨우면 울고 불고 난리  거라며, 조용히 가라고 했습니다. 잠든 딸아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뽀뽀를 해주고, 남편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남편은 홀로 저를 공항에서 배웅해주고, 딸아이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엄마가 떠나는 줄 꿈에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던 딸내미 (당시 48개월) 2018.7.29


새벽 운전해서 배웅해주고 다시 송도에 있는 딸에게 돌아간 남편(2018.7.30)



5시간을 날아 떤선녓 국제공항에 홀로 도착했습니다. 숨쉬기도 힘든 후덥지근한 공기가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원래 혼자 여행하는 걸 즐겼어서 (결혼 전) 혼자 사진 찍는 것에는 익숙합니다. (2018.7.30, 떤선녓 국제공항 입국장)


8월 첫 주부터 출근이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에 7월 마지막 주에 들어가서 집을 구하고, 그다음 주에 출근을 할 참이었습니다.



도착해서 영상통화로 딸아이 얼굴을 보는데, 한눈에 봐도 엄마가 사라져서 엉엉 울고, 또 놀란 표정이더라고요. 엄마랑 곧 다시 만날 거야. 아빠랑 세 달 있다가 만나.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말씀 잘 듣고 있어. 하루아침에 엄마가 다른 나라로 혼자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아이는 상상이나 했을까요. 지금 돌이켜 보면 아이에게 사실대로 말해주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할 것을 그랬나 후회가 되는 부분입니다. 어른들이 덜 힘들고자 거짓말을 했던 것이, 나중에는 아이 마음에 상처로 남았습니다.

6개월이 지나 남편과 아이도 베트남으로 와서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말 안 들으면 엄마가 영영 안 돌아올까 봐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을 잘 들었어요."


사실 몇 달 정도 이미 먼저 가있던 직장동료 커플이 있었습니다. 동료 커플이 집을 구할 때 도와주었던 현지인 부동산 중개업자를 소개받아, 호찌민 빈홈 센트럴 시티에 1 베드룸 아파트를 구했습니다. 약 6개월 정도는 혼자 살아야 하고, 그 이후에도 남편은 일 때문에 한국에 왔다 갔다 해야 했고, 저 혼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며 데리고 있을 참이라 큰 집은 아직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호찌민행 비행기를 탄지 4년이 지났고, 처음 2년은 호찌민에, 그다음 2년은 하노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 여정은 일하는 엄마 혼자서도 해외에서 일하는 기회를 갖고 해외 이주를 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4년이 지나기까지 가족은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제가 약해질 때, 혹은 힘들어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게 해 준 힘이었습니다.


계획된 대로 굴러가는 퍼즐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가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정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떠났습니다. 사교육에서 15년 넘게 일하면서 사교육 밥을 먹고 살아왔지만, 내 아이는 학원을 뺑뺑이 돌며 키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가 아이답게 뛰어놀면서 더 많은 언어를 접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 정말 그러고 있을까요?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립니다. 하지만 비슷한 여정을 시작하는 가족들에게 이런 케이스도 있다는 것을 공유하고, 고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4년 전 그 순간으로 돌아가 이제 한 장씩 지금까지 지나온 여정을 들춰보려고 합니다. 여전히 갈 길이 먼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 워킹맘이지만, 여전히 울고 웃고 소리 지르는 미숙한 엄마지만, 그래도 묵묵히 기도해주고 지켜봐 주는 가족들과, 또 지인들이 있어, 항상 지긋이 마음을 눌러주고 이성을 찾아주는 남편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호찌민에 집을 얻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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