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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름지기 Jan 12. 2023

뿌옇고 모호한 마음

휴직 연장을 앞두고

오늘 휴직 연장에 대해 리더님과 말씀 나누려 회사에 다녀왔다.

주초에 미팅을 잡아놓은 이후 엊그제 대학원 동기 J가 집에 다녀갔고, 어제는 2주 차이로 아이를 낳았던 사촌 S에게 연락이 왔다. 


J는 사내 창업을 하게 되었는데 공동 대표를 맡게 될 것 같다며 나와 남편에게 조언을 구했고, S는 본인이 처음 맡아 긴장했던 전공과목 종강 날 한 학생에게서 이번 학기 최고의 강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개발자이지만 비즈니스적 마인드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J가 자연스레 창업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해 나와 남편 모두 축하를 보냈고 오랜만에 자기만의 비전, 일하는 이유가 확실하게 술술 나오는 청년(나도 청년이지만..)과 이야기를 나누니 머리도 마음도 상쾌해졌다. S가 '이번 학기 최고의 강의'라는 찬사를 받았다는 데에는 학생 입장에서 굳이 강의실을 나가다 되돌아와 그런 말을 남기는 게 얼마나 큰 용기와 품을 들인 건 지 알기 때문에 함께 기뻐하고 뿌듯해했다. 지난 여름방학부터 그 전공과목 강의 때문에 S가 긴장하며 준비하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에 기분이 더 남달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까운 사람들의 이런 성취, 시작, 설렘, 희망과 내가 앞두고 있는 휴직, 면담, 육아 같은 단어들이 내 안에서 대조되기 시작하면서 회사에 나가기 전날 오후부터는 꽤나 마음이 가라앉았다.


특히 연말이라는 계절감이 더해져서 그런 지 '성취'라는 말에 나의 어떤 것을 비견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한 인간을 돌보는 일 자체가 '성취'라는 단어와는 잘 붙지 않는 일이니까.


육아의 KPI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도 모르겠고, 해인이가 요새 밥투정을 살짝씩 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먹는 것 하나는 잘 먹인다'는 것에서 느껴졌던 자기 효능감도 떨어지고. 누가 엄청난 인정이나 칭찬의 말을 해주느냐 하면, 팀원(남편)이 표현을 많이 해주긴 하지만 고객(해인)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도 아니니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고. 


그저 말 못 하는 어린 고객의 데이터(수면, 배변, 식사 양/종류, 체온, 기분에 관한)를 수집하고 읽어내며 돌봄 서비스를 수정해나가고 중단기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내 인생 계획은 당최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가면서도 '이 정도 고민했으면 오늘쯤은 머리가 맑고 상쾌할 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하며 뭐가 뭔지 모르겠는 희뿌연 감정만 헤매고 다녔다.


'1년 휴직 연장 후, 아이 상태가 괜찮아지면 일찍 복귀하겠다'는 안을 가지고 면담에 들어갔는데 리더님도 팀 선배도 그렇게 되면 남은 휴직일수가 그냥 소멸되는데 그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며 말리셨고 '1년 휴직 vs. 바로 복직' 두 가지 안 중에 선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그렇다면 1년 휴직을 택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서도 사실 1년이란 시간이 너무 까마득하고 답답하게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런 내 의중이 드러난 것인 지, 그래도 T.O 1명이라도 더 확보해서 일을 굴러가게 하고 싶은 조직장의 생각 때문이었는지.. 3개월 가족돌봄 휴직 사용 후 아이 상태가 괜찮아지면 복직하고 아니면 그때 가서 1년 휴직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남편이 깔끔하게 휴직을 쓸 수 있는 직장이거나 무엇보다 해인이가 다른 사람 손에 맡겨도 괜찮은 상황이라면 고민도 한결 가볍고 결론도 쉽게 날 수 있었겠지만(과연?) 내년 봄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고, 주 4회 재활도 다녀야 하고, 집에서 자세도 계속 잡아줘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지 싶다.


이미 통화로 이야기된 내용이기 때문에 크게 새로울 것도 없었고 나로서는 운 좋게 등장한 새로운 대안 덕에 3개월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인 데다 길게는 3개월+1년까지 쉴 수 있는 상황이니 산술적으로 보면 베스트이긴 한데 면담을 마치고 와서 나도 모르게 몸살 난 것처럼 몸도 마음도 끙끙 앓았다.


비단 '휴직 기간'의 문제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가 아직 아픈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우선순위에 놓고 고민하는 건 아닌가'하는 것에서 비롯된 죄책감, '육아도 일도 다 놓고 그냥 쉬고 싶다'는 무력감, '내 인생 어디로 흘러가는 건가' 싶은 모호함 등등이 복합적으로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며 둥실둥실 몸집을 더 키워서 그랬던 듯 하다. 


날씨라도 덜 추웠다면 이런 때 일단 나가서 뛰면서 머리를 비워냈을 텐데 집안에 콕 박혀 무거워진 생각만 이고 있자니 몸도 아팠다. 어찌 됐든 엄마로서도 '휴직'까진 아니지만 '휴가'는 필요한 시점인 듯.


그래도 길게 보면 이때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그리워지겠지. 지금 놓인 육아의 터널에서 보면 1년이 길고 긴 것 같지만 결국 해인이는 무럭무럭 자랄 테고 나는 해인이의 뒷모습을 보는 게 익숙해질 날이 올 테니 오래 휴직을 하게 된다 해도 기쁘게 그 시간을 누려야지 싶다. 반대로 3개월 뒤 복직을 하게 된다 해도 내 커리어의 중요한 시점에 임신, 출산, 육아를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고 고됨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을 충분히 누렸고 성실하게 살았으니 (해인이 검사 결과가 괜찮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너무 무거운 마음보다는 행복한 내가 되어 엄마로서의 에너지도 밝게 내어줄 수 있음을 기뻐해야지.


달리지 못하는 대신 남은 연말은 책 속으로 조금 더 빠져들며 자질구레한 고민들은 슬쩍씩 흘려보내야겠다. 단유도 했으니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


무엇보다 이래저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사는 게 인생이라면 누구 하나 크게 아프지 않고, 따뜻한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해인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들에 감사하고 싶다. '네 놈 이름이 불 to the 확실성이냐! 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 같으니라고!' 외치며 감사와 행복이란 이불로 덮어 내 마음 속을 헤집고 다니는 이 잔망스러운 녀석을 힘껏 끌어안아야지. 이 또한 내 인생이니 사랑하며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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