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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름지기 Feb 07. 2023

할머니의 일기장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이 작고 왜소한 몸. 직각에 가깝게 굽어 펴지지 않는 허리. 밥상에서 생선가시를 발라주시던 손. 손주들에겐 '애쓴다', '고생이 많다', 치매 걸린 남편에겐 여든이 넘어서도 '사랑해요' 하시던 예쁜 말씨. 작고 떨리지만 단단하고 밝았던 목소리. 할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 그리고 고모 옆자리에 한결같이 늘 앉아계시던 모습. 


두 살 때 뇌염을 앓았던 고모는 그 후유증으로 한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다. 지금이야 영아 필수 접종으로 예방할 수 있는 뇌염이지만 60년대 낙후된 의료 환경에서 뇌염이라는 그 간단한 병을 고모는 진단조차 받지 못해 치료 시기를 놓치고 장애를 갖게 되었다. 아들 넷을 연달아 낳고 얻은 귀한 막내딸. 아기 때 유달리 눈동자가 크고 짙어 예뻤다는 고모는 할머니가 전주에서부터 서울대병원까지 발품을 팔며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차도가 없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했으나 그마저도 점점 어려워지더니 거동도, 대소변 가리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할머니는 젊은 딸이 흰 머리가 희끗한 50대가 되고 꼬마 손녀가 서른이 넘어가도록 마치 정물처럼 조용히 고모 곁에 앉아 계셨고 아픈 자식의 그 쉽지 않은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평생을 일기와 기도로 살아내셨다. 


은행 사은품, 대학교 수첩 등 자식들이 가져다준 두툼한 노트에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 매일 반 페이지씩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누가 몇만 원을 주고 갔다는 용돈 기입부터 어머니이지만 자식들에 대한 부러움을 표현한 솔직한 이야기, 아픈 남편과 딸을 돌보며 속상한 마음, 주님에 대한 감사 등 인생의 많은 곡절과 희망, 회한과 미소가 할머니의 빼곡한 글씨 안에 살아있다. 그리고 내가 본 가장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할머니는 어찌 보면 서글픈 자신의 삶을 기도 안에서 희망으로 길어 올리셨다. 증조할머니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이었던 우리 집안에서도 할머니의 신앙은 특히 깊었다. 


나는 이 거대한 가톨릭 집안의 이단아마냥 종교가 없지만 해인이가 재활치료를 시작한 이후로는 기도를 자주 한다. 지난여름, 해인이 치료도 내 마음도 너무 힘들었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 사람이든 신이든 그게 누구든 닥치는대로 기도를 하곤 했다. 그제야 '아, 할머니가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성당을 다니며 기도하셨구나.'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이 푹하고 꺼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노트북을 켜고 삼십분이든 한 시간이든 일기일지 한풀이일지 모를 글을 써 내려간다. 그렇게라도 마음속 어딘가에 얹힌 그 무엇을 풀어내고 나면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지만 조금은 홀가분해진다. 할머니도 매일 밤 이런 마음으로 펜을 드셨겠지. 재활 초기엔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몸이 불편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일인지,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겨우 1년이면 끝난다는 이 치료도 나는 매일매일이 너무 힘든데 할머니는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버티셨는지 등등. 


그래서 내가 할머니와 가까웠던 손녀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손녀 중엔 막내, 손주 전체에선 막내 라인 3인방에 들어가는 나는 사촌 언니, 오빠들이 받는 스포트라이트에서도 빗겨 있었고 할머니와 한 도시 안에 살면서도 명절, 제사를 제외하곤 딱히 찾아뵙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리 특별한 손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로부터 내가 받은 사랑이 조용하지만 얼마나 오래도록 깊게 내 곁에 함께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느끼게 되었다.


2018년 봄, 결혼날짜를 잡은 후 남편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날따라 치매기가 약하고 정신이 온전하셨던 할아버지는 농을 치시며 남편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셨지만 할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계셨다. 남편은 그날 할머니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며 '어디 믿을만한 놈인지 한번 보자' 하는 느낌으로 자기를 낱낱이 꿰뚫어 보시는 것 같아 긴장되었다고 했다. 남편이 아빠와 함께 잠깐 동네 마트에 다니러 밖으로 나갔을 때, 베란다 창가에 앉아계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울기 시작하셨다. 날 잡기까지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아빠의 이혼으로 흠이 잡혀 좋은 혼처도 못 구하고 시집도 못 갈까 그간 걱정하셨다며 연신 눈물을 훔치셨다. 할머니는 1920년대 태어나신 분이니 아들의 이혼이 손녀 혼삿길을 막을까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까. 손주들 중 결혼도 가장 늦었으니 할머니의 걱정이 배가된 건 무리도 아니었다. 그제야 남편을 유달리 찬찬히 응시하시던 눈빛, 남편의 본가인 하동이 양반 동네라며 좋아하시던 할머니의 웃음이 이해가 되었고 할머니와 손을 맞잡고 나도 함께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 뒤로 여름쯤부터 할머니는 여기저기 쇠약해지시더니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해 집보다 병원에서 지내시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결혼 준비 중에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나는 할머니를 전보다 자주 찾아뵈었다. 병원 앞 마트에서 사다 드린 바나나를 드시면서는 '어찌 이렇게 달고 맛난 걸 사 왔냐.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본다'며 손녀가 어디 세상 끝에서 평생 못 먹어본 음식이라도 구해온 냥 기꺼워하셨고, 늘 내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병실 안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흔들어 주셨다. 


결혼식을 앞둔 가을 무렵, 할머니는 결국 중환자실에 들어가시게 됐다. 작은 아버지들과 함께 면회를 마친 후 떠날 때 다른 가족들이 모두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사이 나와 할머니는 단둘이 유리벽 너머로 눈을 맞추며 손짓으로 조용히 길고 긴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겐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결혼식을 올리고 시가 시골집이 있는 하동에서 마을 잔치를 치른 이틀 뒤 돌아가셨다. 11월 첫 주 일요일 마을 잔치를 치렀는데 아빠는 이상하게 바로 다음날인 월요일 밤, 내 마을잔치 사진을 할머니께 너무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빠는 예정에도 없이 즉흥적으로 기차를 타고 할머니 병원으로 향했다. 흐뭇하게 사진을 바라보며 너무 좋아하셨다는 할머니는 마치 내 손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았으니 이제 되었다는 듯, 몇 시간 뒤 화요일 새벽 3시경 돌아가셨다. 그날 아침 비행기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나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 6시부터 울리는 벨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신혼여행 짐이 담긴 캐리어를 끌며 막 집을 나서려던 우리 부부는 그 길로 상복으로 갈아입고 전주로 향했다. 유독 노란 은행잎이 선릉 돌담길을 빼곡히 물들인 예쁜 가을날이었고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아침식사를 하던 설렁탕 집에서 할머니의 죽음이 그제야 실감 나 다른 사람들 시선에 아랑곳 않고 눈물을 쏟았다. 


전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남편은 신혼여행 일정을 조정하고 각종 예약건을 취소하며 바쁘게 국제전화를 돌렸고 나는 다행히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었다. 평생을 독실한 신앙의 힘으로 버텨오신 할머니답게 신부님이 여섯 분이나 오셔서 할머니의 입관식을 함께 했고 마지막 날에는 화장터로 가기 전, 할머니가 다니시던 송천 성당에서 할머니를 위해 이례적으로 장례 미사를 치러주셨다. 늘 맨 앞자리에 앉아 작은 몸으로 열심을 다해 기도하시던 할머니는 살아있는 성인이셨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할머니의 마지막 해는 나에게 너무나 특별했다. 할머니와 함께 한 그해 봄, 여름, 가을 세 계절 속에서 한겨울 밤 내리는 눈처럼 조용한 할머니의 기도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내 인생을 차곡차곡 덮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도 해인이 치료를 다녀올 때면 할머니 생각을 자주 한다. 재활이 필요한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할머니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손주가 된 건 아닌가 감히 생각할 때도 있다. 해인이가 돌이 지나도록 혼자 앉지 못할 때는 '나는 겨우 10kg 갓 넘는 해인이를 안고 옮겨주기도 힘든데, 할머니는 70kg는 족히 넘는 고모를 어떻게 씻기고 입히고 옮기셨을까' 매일 생각했다. 결국은 좋아질 거라는 게 확률적으로 정해져 있고 겉보기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해인이를 키우면서도 베이비카페나 문화센터에서 걷고 뛰는 다른 아이들 옆에 시무룩하게 멍하니 있는 해인이를 보는 것도 속상한데 매일, 매년 더 안 좋아지는 딸을 보는 할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이제야 온전히 이해되는 할머니의 표정도 있다. 할머니가 잠시 외출하셨던 어느 날, 옆에 있던 고모가 대변을 보아 바닥에 눕히고 기저귀를 갈며 몸을 닦아주고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신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이 동그래지시더니 평소답지 않게 허둥지둥 뛰어들어오셨다. 내 자리로 부리나케 오셔서 뒤처리를 하시며 '아이고, 착하다. 착하다' 입으로는 나에게 칭찬의 말씀을 하시면서도 할머니 답지 않게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하시던 그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다. 그땐 손녀가 해보지 않은 어려운 일을 처리하느라 놀랐을까 봐 그러시나 생각했지만 이젠 할머니가 왜 그렇게까지 당황하셨는지 알 것 같다. 할머니 당신이 놀라셨다기보다 인지 능력이 낮은 딸이지만 그 딸이 조카 앞에서 혹시나 창피스러울까 싶어 유달리 마음이 급하셨던 게 아닐까. 내가 딸을 낳아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치매 걸린 남편, 몸 불편한 딸을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던 할머니는 아흔 넘게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다 2018년 11월 6일 그렇게 믿고 의지하시던 주님 곁으로 떠나셨다. 


할머니 장례를 치른 후 큰아빠는 부의금 일부를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라며 손주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셨고, 나와 남편은 故이태석 신부님 재단에 그 돈을 기부했다.


입금자명 '한완남'.


청주 한 씨, 완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례명 요안나. 우리 할머니. 초등학교 교사 남편의 빠듯한 월급으로 아들 넷, 딸 하나, 시동생 일곱을 먹이고 입히며 학교 공부에 결혼까지 시키고,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매일 하숙생 포함 스무 명의 밥을 지으셨다는 할머니. 치매 걸린 남편과 몸이 불편한 딸을 거두며 매일밤 일기와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고 아흔이 넘을 때까지 한시도 쉬지 못하셨던 할머니. 많이 배우지 못했고 세상에 당신 이름 한번 제대로 내세울 일 없으셨으나 조용히 바다처럼 모두를 품으셨던 할머니의 이름을 그렇게라도 세상에 내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의 막내 손녀인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할머니만큼 굳세고 사랑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조금이라도 그 분과 닮아가려고 노력하며 그 사랑으로 할머니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며, 기억되게 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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