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름지기 Mar 17. 2023

그래도, 봄.

1. 

오늘 최종적으로 휴직 연장 신청 서류가 결재 완료됐다. 지난주에 리더님께 미리 말씀드리긴 했지만 어제 서류를 올렸고 만 하루도 안되어 리더님, 인사팀 담당자 두 분까지 쭉쭉 '승인'처리가 되었다. 어젯밤 리더님 승인까지만 되어있을 땐 그래도 뭔가 아직 여지가 남아있는 느낌이었는데 오늘 인사팀 결재까지 끝난 서류를 보고 있자니 뭔가 마음이 이상해서 내가 작성한 신청서 화면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2.

내일(3월 18일)은 동아일보 마라톤이 있는 날이다. 10km 코스가 좋아 (올림픽공원 - 종합운동장)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달렸던 마라톤이다. 지난가을, 오랜만에 달리기를 재개하면서 '내년 봄엔 피니시라인에 해인이가 서 있을지 몰라'라고 상상하며 떠올렸던 바로 그 마라톤이다. 몇 년 전 내가 골인하던 종합운동장 피니시라인에 해인이가 우뚝 서서 아빠와 함께 나에게 손을 흔드는 상상을 했었다. 상상은 빗나갔고 다음 주면 17개월인 해인이는 아직 혼자 서지 못 한다. 


3. 

어제 휴직 연장 서류를 올리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헛헛할 걸 본능적으로 예상했는지 to-do-list를 적어두고 바쁘게 움직였다. 오전엔 해인이 재활을 보내놓고 숨도 쉬지 않고 동동거리며 집안일을 했다. 오후엔 유아차도 없이 해인이를 안고 도서관도 다녀오고 무겁게 장도 봤다. 남편이 돌아오는 5시 무렵까지 기진맥진할 정도로 에너지를 썼다. '해인아, 엄마 잠시만 쉴게'라고 말하고 처음으로 아이 앞에 누워 눈꺼풀을 닫았다. 이렇게 피곤해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 건 처음이었다. 해인이가 단풍잎 같이 작은 손으로 자기가 잘 때 안고 자는 토끼 인형을 내 팔에 넣어줬다. 토끼를 토닥토닥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두 손을 겹쳐 볼에 대고 '코-'하고 소리를 냈다. 저녁에는 해인이 사촌 고모(H)가 내가 좋아하는 프리지어 꽃과 함께 지난번 맛있게 먹었던 매운 갈비찜을 만들어 왔다. 그때 한입 먹고는 몸도 마음도 꽉 차서 '친정엄마가 애 키우느라 고생한다고 만들어준 맛'이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배가 그리 고프진 않았지만 마음의 허기를 메우듯 새로 개발했다는 감자전과 함께 갈비찜 양념에 밥까지 볶아 한 입 가득 오랜 식사를 했다. 


4. 

내일 나는 마라톤에 나가지 않는다. 해인이도 아직 서지 못 한다. 휴직 1년 연장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결국, 했다. 그래도 내일 나는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이번주는 그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사춘기 이후로 책을 통해 가장 큰 설렘을 느꼈다. 휴직 신청 서류를 올린 어제, 해인이 고모 덕에 친정엄마 손맛 같은 매운 갈비찜과 내가 좋아하는 감자를 실컷 먹었다. 덕분에 어제는 맛있는 걸 잔뜩 먹고 행복했던 날로 기억됐다. 서류가 결재된 오늘은 성수동에 다녀왔다. 오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소품들이 잔뜩 있는 가게에 들러 예쁜 비누도, 해인이 식단표로 쓸 맘에 드는 메모지도 소중히 데려왔다. 덕분에 오늘은 즐거웠던 성수동 나들이로 기억될 거다. 내일은 마라톤 대신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삶을 일곱 계절 살아낸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러 달려간다. 덕분에 내일도 잔잔한 용기와 행복을 얻은 날로 기억되면 좋겠다. 밤이 깊어 3월 18일 0시가 다가오니 조금은 (아니 꽤) 슬프지만. 


그래도, 봄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의 일기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