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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름지기 Mar 17. 2023

2.14 검진 당일

검진 전날 밤, 해인이를 재우 함께 잠들었다가 새벽 2시 무렵 깼다. 해인이 재우면서 잠드는 일은 거의 없는데 피곤하기도 했고 걱정되는 일들을 약간 묻어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2시에 깨서 병원 동선을 생각하면서 차에서 해인이를 내렸을 때부터 어떻게 이동할지 시뮬레이션을 했다. 소아병동 가는 길, 도착 확인 접수대, 영유아 계측실, 진료 대기실, 교수님께 할 질문, 응가했을 때 기저귀 갈 곳, 울면 달래줄 동물 전광판 위치, 진료 마친 후 동선 등등을 머리에 그리며 해인이가 최대한 힘들지 않고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머릿속 예행연습을 여러 번 했다.


4시 이후로 조금이라도 자 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고 해인이도 이앓이를 하는지 자꾸 소리를 지르며 깨서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하다가 아침 8시쯤 해인이 식사 준비를 남편에게 맡기고 잠깐 눈을 붙였다.


오전 9시 45분 진료여서 부랴부랴 서둘렀는데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대기가 길지 않아서 (그래도 40분은 기다렸지만.. 이 정도면 양반인 편) 진료실까지 가는 과정은 수월했다. 대기 중에 이리저리 병동을 돌아다니면서 포대기에 싸인 신생아도 여럿 보고 항암 치료 중인 지 머리가 다 빠져 민머리인 아이들도 몇 명 보았는데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이들은 정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복도 구석에서 앙앙 우는 5-6개월 아기를 안고 달래는 엄마도 보았는데 뒷모습만 봐도 너무 지쳐 보여서 내가 대신 안고 달랠 테니 잠시 쉬시겠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소아병동에 왔으면 아이가 어딘가 아픈 것일 테니 모르는 사람의 오지랖이 혹시나 아이에게 해가 될까 싶어 참았지만... 그 와중에 해인이는 아기에게 멀리서 손을 흔들며 울지 말라고 토닥이는 제스처를 취해서 아이 엄마도 나도 잠깐이나마 웃었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해인이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고 여느 때처럼 교수님은 친절하셨다. 다만 검진 결과는 내가 조심스레 기대했던 것보다 좋진 않았다. 돌 검진 때는 네발기기도 못 했었는데 지금은 어떠냐고 물으셔서, 얼마 전부터 잡고 서기, 옆으로 걷기를 많이 시도하고 손을 떼고 서려는 시도도 한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꽤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큰 리액션이 없으셨고, '엄마가 앞에서 잡고 걸어볼까요?'라고 하셔서 당황한 나는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어서요'라고 답했다.


그럼 누워서 검진하자고 말씀하시며, 늘 하던 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인이 관절들을 꺾으며 각도를 재고 레지던트 선생님은 옆에서 수치를 받아 적었다. 매번 나는 잘 모르겠는 용어들로 'OO 몇 도, OO 몇 도'라고 읊으시는데 오늘은 무릎을 고무망치로 톡톡 두드리며 조금 고민하시다 '음... normal active라고 일단 적어주세요'라고 하셨다. 나 혼자 속으로 'normal이면 좋은 거겠지?' 하면서도 한참 고민하신 게 마음에 걸렸다. 검사대 위에서 해인이는 교수님이 건네주신 노란 튤립을 보며 잘 놀았고 울지 않고 잘한다며 칭찬도 들었다. 예전에는 검사대에 눕기만 해도 울었는데 이제는 이만큼 컸구나 싶어 대견한 마음 반, 이런 검사가 익숙해진 건가 싶어 안쓰러운 마음 반. 기분이 복잡했다.


교수님은 '아직 근육이 흐물흐물한 느낌은 있다. 왼쪽 발목이 계속 돌아가는 건 왼쪽 다리 근육 힘이 약해서 그런 거다. 그래도 좌우 근육 균형이 그렇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오른쪽보다 왼쪽 다리로 체중 지지를 더 먼저, 많이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줘라. 옆으로 갈 때도 왼쪽으로 가도록 유도해라. 발 아치가 계속 무너지면 나중에 발 밑에 패드를 사용해야 될 수도 있는데 우린 너무 어린 나이부터 처방하진 않는다. 18개월까진 무조건 걸어야 한다. 일단은 경과 관찰. 지금 검사를 할 시기를 계속 보고 있는 건데, 다음번 검진 땐 검사를 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와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마음의 준비' 같은 단어는 엄청 심각한 상황에서 쓰는 거 아닌가..? 의학 드라마에서나 본 것 같은데..라는 마음으로 '예를 들면, 어떤 검사일까요?' 여쭤보니 '뇌 MRI, 신경 검사, 근육병 검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저질환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해서란다. 저런 검사를 할 수도 있다는 건 저번부터 들어서 모르고 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들을 때마다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그나마 긍정적이었던 이야기는 '사경은 이제 거의 없죠?'라고 물으셔서 '네, 그런 것 같아요'라고 답한 정도.


이제는 나도 상쾌한 답변이 안 나오는 진료실 분위기가 익숙해진 건 지 담담하게 진료실을 나와 6월로 다음 예약을 잡았다. 조금이라도 진료를 빨리 보고 싶어 5월로 잡고자 했으나 그때까지 예약이 꽉 차있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나마 가장 빠른 6월 중순으로 예약하고 해인이 겉옷을 입히고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만나 병원을 나섰다. 진료 마치고 해인이 옷을 입히면서도 나도 모르게 계속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와서 해인이에게 미안했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당연히 1%의 확률이라도 안 좋을 가능성이 있다면 보호자에게 보수적으로 말을 해줘야 하는 것이 맞고, MRI처럼 큰 검사는 갑자기 하겠다면 당황할 수 있으니 미리 언급을 해주는 것도 맞다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이상하게 하루종일 너무 피곤하고 마음이 어지러웠다.


고생한 해인이를 더 많이 안고 달래줬어야 하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나도 너무 힘들고 지친 마음에 (아니면 실망감 때문일지) 해인이를 안방에 앉혀두고 '엄마 옷 갈아입고 올게. 잠깐만'하며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암막커튼을 쳐둬서 캄캄한 방 안에서 해인이가 혼자 토끼인형을 안고 손을 빨며 앉아있는 옆모습이 너무 짠하고 미안했다. 내가 좀 힘들다고 아이를 품어주지도 않는다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복잡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남편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 하고 혼자 밖에서 점심도 먹고 들어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는 낮잠 시간이 꼬여 간식을 못 먹은 탓에 잔뜩 짜증이 난 해인이가 자꾸 치즈를 달라며 울고 보채서 '해인아!'라고 이름을 부르며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다. 순간이지만 흠칫 놀라는 표정에 또 금세 미안함이 몰려왔다. 결국 해인이는 울고 불고 악을 쓰며 아빠와 함께 간신히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저녁밥 먹이기까지 마치고 거실에 기진맥진해서 누워있었는데 '해인이가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아'라는 남편의 말에 해인이에게 미안했던 오늘의 감정이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와 눈물이 펑 터졌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데 해인이가 엉금엉금 기어와 내 얼굴에 뽀뽀를 해줬다. 그것도 두 번이나. 원래는 내가 뽀뽀해 달라며 쫓아다녀도 절대 안 해주고 박치기를 하며 장난만 치던 해인인데 오늘은 내 얼굴을 잡고 뽀뽀를 해주고선 위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 같은 날, 정작 엄마인 내가 이 어린아이에게 위로를 받는구나.


검진 결과를 전해 듣고 다들 '의사들은 원래 그래. 해인이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는 말을 할 뿐 한두 달 전부터 긴장하고, 전날 밤 잠 못 이루고, 병원에서 동동거린 내 마음을, 오늘의 긴 내 하루를 걱정해 준 사람은 없었는데...


해인이가 나를 위로해 주고, 철없는 엄마는 그 위로를 또 덥석 받고.

나 스스로 '나는 네 맘 안다' 토닥이며 그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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