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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름지기 Mar 17. 2023

내 삶이 누군가의 꿈이 되다니

2023.02.09 일기

어제 저녁, 대학교 시절 함께 피지로 봉사활동을 떠났던 일명 '피지팀' 멤버들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피지라는 이름만 들으면 휴양지를 연상하기 쉽지만 우리가 갔던 곳은 수도에서 3시간 이상 떨어진 오지마을이었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면 몇 시간씩 걸어 다녀야 하는 곳에서 마을 도서관을 짓는 일을 했다.)


40도를 웃도는 더위에 하루종일 익숙지도 않은 목조 작업을 하고 손바닥만 한 나방이 날아다니는 간이 샤워실에서 씻고 발전기 전력에 의지해 컴컴한 밤을 보내면서도 무던한 성격에 둥글둥글한 사람들이 운 좋게 모인 덕인 지 피 끓는 20대 열댓 명이서 단 한번 잡음도 없이 그 시절을 보냈다. 피지에 다녀오고 한 학기 동안은 멤버들 자취방 문턱이 닳도록 매일 같이 우르르 모여 부대끼며 지냈고 각자 취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사는 지역이 달라지면서 만나는 일은 뜸해졌지만 10주년엔 모교에 모여 같이 사진도 찍고 여전히 그 시절 이야기만으로도 몇 시간은 거뜬할 만큼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때 보았던 은하수는 그렇게 아름다운 걸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굉장했고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그 장면을 똑같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특별한 사람들이다.)  


어제는 그 멤버들 중 막둥이인 J, 속 깊고 착한 M이 퇴근 후 우리 집에 방문해서 처음으로 해인이 얼굴도 보고 함께 놀다 해인이가 잠들 무렵 나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셋이 모여 이야기하는 것도 2년 만이었는데 바탕이 선하고 성실한 사람들인지라 오랜만에 만나도 편안하고 대화가 거슬림 없이 부드러웠다.


이제는 어디 가서 하기 힘든 학교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너무 편했다. 내가 학부생이던 무렵에는 (우리 학교, 우리 단과대는 특히) 집회나 시위가 많았는데 J가 같은 단대 출신이기 때문에 그 시절 대자보가 매일같이 붙던 정대 후문 이야기도 하고, 한 칸짜리 김밥집이 번쩍번쩍한 건물로 확장 이전했더라, 자주 가던 인쇄집들이 다 망해버렸다, 정문 앞에 중국 식료품점이 즐비해져 이상했다, 오랜만에 학교 갔더니 강의실이 낡아 보이더라.. 등등의 별 것 아니지만 마음 한편이 촉촉, 따뜻해지는 대화들을 나눴다. (교가에 등장하는 '마음의 고향'이란 가사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치관, 삶의 태도 같은 나름 무거운 (이것도 어디 가서 하기 힘든) 대화들도 나눴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비혼주의자였던 M이 이제는 결혼과 출산이 너무 하고 싶어졌다는 것. 그리고 안정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자기 인생의 꿈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에서 작년 말부터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면서,

'언니, 오늘 보니 언니가 사는 삶이 내 꿈이야.'라는 말을 대뜸 던져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응? 내 사는 일상이 누군가의 꿈이라니..? 태어나서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M에게 '오늘은 나도 아침에 미용실을 다녀오고, 오랜만에 시부모님 댁도 가느라 옷도 갖춰 입은 상태에서 네가 우리를 봐서 그렇다. 평소엔 츄리닝 입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남편이랑도 맨날 예쁘게 말하는 거 아니고 자주 투닥거린다.' 등등.. 이런저런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놨는데, M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은 그 모든 말들을 튕겨내는 듯 했다.


'그래, 알겠는데 그래도 그게 내 꿈이라니까.'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눈빛 앞에서 마지막엔 나도 그저 웃고 말았다.


집에 와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남편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M이 우리가 사는 삶이 자기 꿈 이래'라고 하자 남편은 '그럴 수 있지. 난 그럴만한 것 같은데?'라고 대답해서 2차 충격.


'아니, 그런데 우리 (이렇고 저렇고 저렇고 이렇고.. ) 하기도 하잖아.'라고 한참을 조잘조잘하고 있자니,

남편이 또 '어쨌든 행복하잖아.'라고 대답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오, 맞네. 그렇지.


힘들 때도 분명 있지만 '감사'와 '행복'이 내가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인 것도 사실이니 누군가의 꿈이 될 수도 있겠구나.


말로는 소박한 행복을 되뇌면서도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꿈꿀만한 삶이란 더 거창하고 크고 화려하고, 반짝반짝하고 드라마틱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가 외출한 사이 울지도 않고 예쁘게 곤히 잠든 딸, 밀린 설거지를 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굿나잇 인사와 함께 정작 본인은 또 조용히 일을 하러 들어가 밤을 밝히는 남편, 우리 세 식구 누워 잘 수 있는 따뜻한 집. 잠들기 전,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헤아려보니 이만하면 '나 자신'이 꿈꾸던 삶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어제와 달리 츄리닝 바람으로 해인이와 하루종일 바닥을 기어 다니 설거지 쌓인 부엌에서 밥 한술 국에 말아 후루룩 저녁밥을 때웠지만 오늘은 초라함보단 왠지 모를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꿈꾸던 순간에 지금 들어와 있는 거야.' 감사하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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