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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름지기 Dec 07. 2022

410일 +

아이의 예쁨만을 바라본 온전한 하루

오늘로 해인이 생후 410일.

저녁 식사 준비로 바쁜 내 옆에서 해인이와 함께 주방 바닥에 쪼그려 앉아 빨래를 가지고 놀던 남편이 말했다. 


'해인이가 스스로 잘 앉으니까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너무 좋아.'


오늘 내가 느낀 그대로를 정확히 남편도 느끼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에 흠칫 놀라면서


'나도. 오늘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너무 가벼워. 해인이 예쁜 모습에만 온전히 집중하면서 하루가 가니까 너무 신기해.'라고 대답했다.


그동안은 틈틈이 무너진 자세 잡아주고 목 기울기 체크하느라 온전히 아이의 귀여운 모습만 마음에 담지는 못 했었다. 늘 아이의 지금, 반짝이는 이 순간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되뇌었지만 결국 자세를 고쳐주고 수시로 타이트해진 근육을 늘려줘야 하는 일도 보호자가 해야 할 몫이니까. 엄마가 뭘 하고 있는 건 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싫다고 버둥거리는 아이 뒤에서 타이트해진 골반을 늘리고 다리를 당기며 숨죽여 눈물 흘린 적도 많았다.


해인이 생후 50일 무렵 좌측 근성 사경 진단을 받고 물리치료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어느새 1년.


지난달에는 유독 마음이 힘들었는데, 병원에서도 센터에서도 그렇게 많이 듣던 '돌 되면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말이 무색하게 해인이가 아무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스스로 앉지 못하니 오래 앉아있거나 엎드려 있으면 혼자 자세를 바꾸지 못해 답답해했고 네발기기를 못 해 배밀이로만 바닥을 기고 다녔다.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꽃길이 펼쳐질 거다 라는 어른들 말만큼이나

'돌 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에 나는 많이도 기대고 있었던 것 같다. 돌이 지나고 하루, 이틀, 열흘, 스무날이 지나도록 아무 차도가 없으니 마음이 점점 축축하게 젖고 무거워져만 갔다.


그러나 올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가고 해인이가 드디어 정말 스스로 앉을 수 있게 되니 나도 모르게 그간의 생생한 기억과 감정이 흐려질까 두려워 기록을 남기고 싶어졌다.




작년 11월 중순, 해인이 생후 1달이 지나갈 무렵부터 유독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이 트림시킬 때 무릎에 앉혀두면 허리가 자꾸 휘어지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신생아가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항상 오른쪽만 보는 것, 왼쪽으로 살짝 기운 목,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휘어져 보이는 허리는 엄마인 내 눈에는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당시 남편은 지금은 목에 힘이 없어 그럴 거라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고 12월이 넘어가면서 혼자 신생아를 데리고 병원에 갈 자신이 없던 나는 남편에게 거의 사정하다시피 해인이를 데리고 병원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이미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사경이 아닐까' 하는 감을 잡고 있던 터라 더 미루지 말고 당장 대학병원 소아 재활의학과에 가보자고 했지만 코로나가 걱정됐던 남편은 몇 주 뒤로 잡혀있던 영유아 검진 때 소아과 선생님께 소견서를 받고 가보자고 했다. 그 사이에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라면서. (하지만 신생아 사경은 몇 주 차이가 정말 크다. 빨리 갔어야 하는 게 맞았다.)


영유아 검진 당시, 동네 소아과 선생님은 사경이 아니라고 진단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소견서는 한 장 써달라며 부탁하는 나에게 마지못해 소견서를 건네줬다. 그리고 바로 아산병원 소아 재활의학과로 예약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해인이는 근육에 있는 멍울 크기도 꽤 크고 좌측 목 근육이 우측보다 두 배 더 두꺼운, 가볍지 않은 사경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올여름쯤부터는 목 기울기도 회전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발달도 느려 걱정이 많았는데 아산병원에서도, 매일 물리치료를 다니고 있는 재활센터에서도 해인이의 근긴장도가 낮아 호전이 느린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근긴장도'라는 용어 자체를 처음 들어, 검색도 많이 하고 선생님들께 질문도 참 많이 했는데 결론적으로 근육이 팔랑팔랑 하고 흐물흐물한 아이라는 말이란다. 그 원인은 근육 자체의 성상이 그러한 것일 수도, 뇌의 문제일 수도, 신경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했다. 처음 인터넷 검색을 했을 땐 뇌에 문제가 있어 근긴장 저하증, 무력증 진단을 받은 신생아는 자가 호흡도 삼키는 것도 하지 못해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는 글들이 나와서 너무 놀라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다행히 해인이는 그렇게 심각한 수준으로 긴장도가 낮은 건 아니라고 했다. 지난 10월 검진 때 교수님 말씀이 해인이가 정말 심각해 보였다면 당장 입원시켜 정밀 검사를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4개월 정도 더 두고 봐도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음 검진일은 내년 2월 중순으로 잡혔다.


다만, 그때까지도 행동이 많이 나오지 않으면 그땐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며 움직임이 잘 나올 수 있도록 재활도 열심히 다니고 많이 도와주라고 하셨다. 혼자 앉을 수도 없다면 아이가 속으로 굉장히 답답해하고 있을 거라면서.


그렇게 해인이는 올해 9월까지는 매일, 9월부터 지금까지는 해인이와 우리의 휴식을 위해 주 4회(단 하루의 휴식이지만) 물리치료를 다니고 있다. 최근에는 몸이 커지고 의지도 자아도 생기면서 집에서는 운동과 스트레칭을 완강히 거부해서 센터에서 하는 운동이 거의 전부이지만 그전까지는 집에서도 하루 종일 자세 잡아주고 거실에 큰 전신 거울과 짐볼, 운동 순서를 적어둔 종이를 붙여두고 매시간마다 맞춰서 스트레칭과 터미 타임, 복근 운동을 시켜주는 게 우리의 주요 일과였다.


신생아 때는 모유 수유만으로도 지치는데 매 수유 텀마다 수유 끝나고 잠든 아기를 30분에서 1시간씩 스트레칭시켰다. 잠들어있을 때가 가장 저항이 없기 때문에 사경을 위한 목 스트레칭은 그때 하는 부모들이 많다. 새벽 수유 때도 남편이 1시간씩 스트레칭을 해주고 해인이를 자리에 눕혔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은 극한의 스케줄이지만 사실 가장 어려웠던 건 병원과 치료실을 데리고 다닐 때 들리는 아이들의 비명 섞인 울음소리였다.


작년 12월 해인이를 안고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처음 아산병원을 방문했던 날, 아이를 낳은 지 두 달도 안됐던 나는 몸도 마음도 아직 지쳐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 1인밖에 출입이 되지 않아 혼자 갓난쟁이를 안고 대기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예약 여부와 관계없이 대학병원 대기는 어찌나 그렇게 긴 지 그날도 꽉 찬 대기실에서 1시간을 기다리는데 소아 재활 치료실이 바로 앞에 있어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끝도 없이 들렸다. 


꽉 찬 사람들 속에 내 팔뚝만 한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바로 생지옥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다른 집 아이의 울음에도 마음에선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품 안에서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이런 공간에 왜 너와 내가 있어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과 슬픔으로 다리 한 번 풀지 못하고 공포와 긴장에 몸이 얼어 한 시간을 내리 꼼짝 않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정확한 멍울 크기와 근육 두께 확인을 위해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찍던 올 2월에는 백일 남짓한 아이를 안고 엑스레이실 앞에 대기하면서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눈이 안 보여서 네가 나을 수 있다면 엄마 눈이 멀어도 돼. 엄마가 목숨이 없어져야 된다면 그래도 돼. 엄마가 지켜줄 거야. 해인이는 무조건 괜찮을 거야'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걸어 다니며 아기를 안고 달랬다.


그 후로는 검진 때마다 병원에 가는 과정, 동선 자체는 나름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병원의 무거운 분위기와 이렇게 아픈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 자체는 나를 마음 아프게 한다. 지난 검진 때는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떨어지면서 척추를 다쳐 못 걷게 된 아이가 해인이 앞 순서로 다녀갔다는 말도 들었다. 너무 가슴 아픈 사연들이 모이는 곳에 나와 해인이가 발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는 않는다.


매일 다니는 재활 센터에도 3개의 치료실이 있는데 해인이가 있는 치료실 외에 나머지 두 개의 치료실에서도 끊임없이 아이들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지난봄에는 너무 피곤해 해인이 치료는 남편에게 맡기고 치료실에서 살짝 나와 대기실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붙이고 있는데 해인이는 아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 다른 아이들 울음소리에 심장이 칼로 찌르는 듯 아파 눈물이 계속 흘러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고는 있지만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잠들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결국 해인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마자 해인이 치료실로 달려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치료시간에 너무 우는 아이 모습에 트라우마가 생겨 도저히 치료를 못 보겠다며 엄마 대신 할머니가 치료실에 들어가는 집도 있다. 사경 치료 카페에 가 보면 우울증을 겪는 엄마 아빠들도 많은데 정말 웬만한 몸과 정신이 아니고서는 버티기 힘든 과정인 건 확실한 것 같다. 수술을 하는 것도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병도 아니지만 (호전이 안 되는 소수의 경우 수술을 하기도 하고, 낮 병동에 입원해서 집중 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있긴 하다) 교수님에게든 물리치료 선생님에게든 다른 보호자들에게든 늘 듣는 말은 '어쩌다 한번 가는 재활 치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집에서 부모가 어떻게 해주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기 때문에 아이의 호전 속도가 온전히 나에게 달린 것만 같아 책임감에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스트레스에 무딘 남편도 혼자 치료를 데리고 다녀온 날엔 가끔씩 정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해인이가 오늘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 걸 티 내지 않고 참았는지 이야기한다. '우리도 한 번씩 치료 다닐 때 어머님께 부탁드려볼까?' 물어봤을 때는 바로 고개를 흔들며 '난 아무한테도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맞다. 정말 고통스럽다. 


내 자식이 아픈 모습을 보는 부모 누군들 가슴이 남아나겠냐만은 

영문도 모른 채 목을 찢는 듯한 고통으로 스트레칭을 받고 

잘 쓰지도 못하는 근육을 억지로 써가며 몸을 움직여야 하는 아이,

성인 남자의 힘으로 내리누르는 무게를 느껴가며 골반 근육을 펴줘야만 하는 아이가 

나를 향해 악을 쓰며 울고 불고 소리를 지를 때 이 모든 걸 그만 멈춰주지도 못하고 눈앞에서 바라보며 말로만 달랠 수밖에 없을 때의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숨이 넘어가게 울며 안아달라고 팔을 뻗을 땐 정말 불에 떨어져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 울음소리와 얼굴이 머리에 동동 떠다니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기도 한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항상 마음이 젖어있는 기분이라 이유식을 만들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자려고 누워있다가도 핸드폰을 하다가도 눈물을 훔칠 때가 많다.


그래도 해인이는 이렇게 부족한 엄마에 비하면 얼마나 강한 지 치료가 끝나고 안아주면 그 즉시 바로 울음을 뚝 그치고 방긋 웃는다. 치료 후 기저귀 가는 시간에는 센터에 있는 다른 친구들, 엄마들에게도 혼자 뭐가 그리 반가운 지 인사하느라 분주하다.


심지어 6개월도 안됐을 무렵에도 치료 도중에 눈물을 꾹 참고 있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주기까지 했다. 해인이 목을 왼쪽으로 꺾어 스트레칭하던 중이라 우리 부부에게는 해인이 얼굴이 안 보였는데 선생님이 손에 힘을 풀고 해인이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리고는 엄마 아빠를 향해 씨익 웃어줬다. 


해인이 얼굴을 못 본 체로 '잘하고 있어, 해인아. 화이팅 화이팅' 하며 응원하던 우리는 그 순간, 

'해인아 너무 힘들면 그냥 울어'라고 말하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때 이야기를 하면 나도 남편도 여전히 목이 멘다.


임신 때부터 여러 이슈를 넘고 넘어 고생해가며 세상에 나온 해인이여서 진작부터 대단한 딸, 용기 있는 아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때부터 나는 더욱더 해인이를 나에게 과분한 딸, 어리지만 존경스러운 아이, '나의 작은 영웅'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사경은 눈으로 잘 느껴지지 않아 주위의 격려를 받기가 힘들다. 근긴장도가 낮고 발달이 늦은 것도 마찬가지다. 시가든 친가든 가족들에게도 늘 '걱정이 지나치다, 애들은 다 내버려 두면 언젠가 하게 돼 있다, OO네도 이런저런 부분이 늦었지만 결국은 다 문제없이 잘 크고 있다'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지난하고 괴로운 치료 과정 자체에 대한 공감을 받아보지 못했다.

가끔 나와 남편은 이런저런 말들의 홍수와 무심함 속에 '딱 3일만 치료 데리고 다녀보면 못 하겠다고 두 손, 두 발 들 거면서'라는 말로 우리끼리 흥, 칫- 하며 넘기곤 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추위에도 더위에도 민감한 신생아 시절부터 지금까지 치료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에게 치료 시간에 맞춰 잠에서 깨야 한다고 설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늘 치료시간에 최상의 컨디션일 수 있도록 모든 하루의 스케줄을 맞춰왔다. 10분 단위로 먹고 자는 시간을 체크하길 수백 일이었다. 너무 졸려해서, 때로는 너무 배고파해서 힘들게 간 치료를 중단하고 집으로 데리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치료를 시작한 작년 12월부터 올 2월까지는 백일도 지나지 않은 신생아라 지하 주차장의 찬 바람조차도 조심스러워 아기를 꽁꽁 싸매고 다녔고, 간혹 남편 없이 혼자 치료를 데리고 간 날에는 장롱면허자의 비애로

주렁주렁 짐을 이고 지고 아기띠를 한 채 택시로 이동하며 진땀을 뺐다. 치료를 마친 아이는 가뜩이나 힘들고 예민해서 모든 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게 '애를 교과서적으로 키운다, 규칙대로 키운다, 유난이다' 소리를 들어가며 여기까지 왔다.


열심히 삼시세끼 해먹이는 이유식에도, 1년 넘게 하고 있는 모유 수유에도, 루틴한 아이의 일상에도, 틈틈이 자세를 꼭 잡아줘야 한다는 우리의 설명에도, 주 4회 다니고 있는 물리치료에도 칭찬으로 포장된 어떤 기묘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시어머님이 '애 병원 뺑뺑이 돌리지 마라' 하신 말씀에는 너무 서운해 한동안 연락을 안 드리기도(더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못 드리기도) 했다.


그동안 길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나는 나에게 꽤 엄격한 사람이었고 늘 기준이 높아 나를 채찍질하기 바빴다.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이 정도면 됐다. 잘했다'라고 칭찬해준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지난 1년에 대해서만큼은 정말 애썼다고, 아무도 몰라도 '나는 안다'라고 나를 다독여주고 싶다.


아무리 돌려도 돌아가지 않는 아기 목을 계속해서 돌려주며

젖이 불어 열이 펄펄 나는 가슴을 붙잡고

아기 침대 귀퉁이에 무릎 꿇어 숨죽여 펑펑 울던 그 새벽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정말 애썼다. 정말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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