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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J K직장녀 May 23. 2023

조용한 연말

나의 애도일지 5편

별거를 하고 여행까지 다녀오니 준비도 하기 전에 연말이 코앞이었다. 그와 나는 연말을 어떻게 보낼지 의논했는데 각자 가족 모임을 생략하고 크리스마스엔 그가, 연말엔 내가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본디 연말은 늘 가족들의 애도일과 기념일 등으로 복작복작하게 지내왔었고, 시집을 가기 전에는 늘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친구들과 시끌벅적한 연말 파티를 하면서 보냈으니 처음으로 맞는 조용한 연말이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나는 지난 몇 년간 매주 가던 친정으로 향했다. 전화로 엄마에게는 미리 말했지만 가족들에게 마침내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길 마음먹는 것은 나 같은 사람도 시간이 좀 필요했다. 매주 타던 친정에 내려가는 경기 버스, 그리고 그 집에서 5년 만에 처음 맞는 고요한 아침은 참 이상했다.


이혼하고서 비슷한 일을 겪은 돌싱들을 간혹 만나면 이혼이라는 경험을 자기 인생의 오점으로 혹은 실패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이는 아마도 실제로 이혼한 사람은 너무 많지만 입밖에 내는 것을 터부시 하는 한국 사회의 폐쇄적이며 보수적인 속성 때문이리라. 호주에 와서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거나 우연히 만나 내가 최근에 이혼을 했다고 하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혹은 '힘들었겠네, 하지만 누구나 충분히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는 등의 무심한 반응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나를 이혼녀라고 소개를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는 [실패]로 내 인생을 [실패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했고 그때의 내게는 확신의 선택이었으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이었다. 우리 모두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방금 사용한 ‘완벽’이라는 단어 자체에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완벽’이라는 것이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 단어 자체가 절대로 완벽할 수 없는 단어라서 이를 느끼고 나서부터는 언어에는 힘이 있는지라 내뱉기를 자제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이 경험이 그저 그 시점에 내가 할 수 있는 내 인생의 최선이자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내가 힘이 든 것은 모든 경험과 선택에는 값이 존재하기 때문에 값을 치르고 있는 것 뿐이다. 값을 다 치르고 나면 대게 우리가 나중에 물건의 값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듯 이 시기도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늘 눈에 밟히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이 후회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 인생의 5년이라는 시간과 모든 일련의 과정들, 결혼으로 맺은 관계가 내 부모에게 대못을 박는 일이 되었다는 점이다. 아빠의 생신과 크리스마스는 맞닿아 있어서 늘 이 즈음 모여 파티를 했다. 올해는 왜 남편을 데리고 오지 않았냐는 질문에 나는 무어라고 대충 둘러댔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늘 사위에게 일이 힘들겠지 싶어 한 번도 무어라 토를 달지 않았던 아빠는 그러려니 했다. 어쩌면 이런 게 더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내가 시댁에 하는 것만큼 우리 남편이 친정에 하길 바랬는데 그는 한 번도 서글서글한 사위가 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나도 처음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어색하고 어려운 며느리가 되어갔다. 소고기로 저녁을 먹고 집에 와 케이크에 촛불을 불고 와인을 한병쯤 비웠을 땐가 할 말이 있다고 입을 뗐다. 그리곤 아무리 내가 내 선택에 대해 최선이라 설명하고 '난 더 잘 살 거고, 더 행복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확신을 주려고 한들 이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는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 그 이후로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한들 엄마 아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도 눈빛과 표정으로, 때때로 무언으로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늘 울고 있었고 이런 일을 겪게 된 딸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나이 든 부모를 이렇게 24시간 걱정을 시키고 불안하게 만들다니 이것은 내가 살면서 저지른 진짜 '불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고 독립적 개체이니까, 나는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했다. 그래서 이 선택을 번복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전했고, 엄마아빠는 그 길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하려고 하지도 않고 지지만으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별거부터 지금까지 심적으로 불안하고 힘들어서 이따금 부모에게 역정을 내기도 하고 일부러 거리를 두고 어른답지 않은 행동을 하곤 했다. 그들 앞에서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고통이 통제가 되지 않아 아프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빠가 결혼을 끝까지 말리지 않은 자신을 질타하는 것을 보며 내 선택인데 자책하는 부모의 마음에 무너졌지만 도리어 티 내지 않기 위해 그만하시라고 화를 내었다. 실은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내가 결혼이란 사회 제도로 인해 떠나왔던 가족이 이 세상 유일한 변하지 않는 내 편이고 내가 언제든 돌아와도 말없이 안아줄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스무살에 고향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다시 느꼈다. 이제 나는 내가 한 선택의 값을 제대로 치르는 일이, 부모 가슴에 대못 박은 것은 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가 그저 내가 잘 살고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내가 지금이 더 편안하고 나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부모란 나의 사소한 행복만을 바라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런 날들이 이기적이고 철없이 마음대로 살아온 딸인 내가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지금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곳에서 초록초록한 나무를 바라보고 파도를 앞에 두고 명상을 하고 내 최선의 노력을 다해 현재에 집중을 한다. 글을 쓰며 내 과거를 애도한다. 그리고 서랍에 넣고 그 서랍을 잠근다. 이 반복된 행위는 당분간 애도가 충분했다고 느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한편 연말에 가있었던 친정은 우리 집 같지 않고 1부터 100까지 불편해서 하루빨리 방배동의 코딱지만 한 전셋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느새 나도 결혼 생활과 내가 이룬 가정에 너무 익숙해졌었구나. 그리고 내 세계와 에고는 너무 커지고 견고해져 버렸구나. 다시 혼자가 되더라도 원가족과 함께 살 순 없을 거란 것을 그 순간 알았다. 나만의 세계를 내 힘으로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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