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꾸물 Jan 09. 2020

어리숙한 책임

준비되지 않았는데 덥석 안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십 대 중반이 담당하는 책임이라고 하면 대개 엉망이다. 책임을 진 다기보단 어쩔 수 없이 해 낸다.

준비되지 않았는데 덥석 안게 되는 것들이 있다. 서울에 처음 혼자 살 집을 구한 겨울이 그랬고 나로서 삶이 결정되는 고양이 두 마리가 그렇다.

잘할지 아닐지 모르는 상태로 던져진 것들 어떻게든 책임지 해결해야 했다. 내게 그런 것들은 주로 혼자 사는 젊은 여성 역할일 때 자주 찾아왔고, 얌전히 타이밍을 보다가 불쑥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었다.  


지난 6월,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연 방문을 도로 닫았다. 장수말벌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문짝에 등을 기대고 아니 쟤가 왜..? 어떻게? 혼란 속에 눈동자를 굴렸다. 폭력 없이 말끔한 평화 협정을 맺고 싶은데 말이 통할 리 없겠지? 악수하려 치면 쏴버리겠지? 그럼 나는 죽겠지? 쟤를 때려잡았다가 우리 집 앞에서 벌들이 보이콧 시위하는 거 아니야? 어차피 때려잡을 깜냥은 없구나.. 온갖 물음표가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해결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집 동거 조건에는 맞지 않아서, 나가거나 죽어줘야겠어. 생각만 호하게 했다. 다음 날 집에 있는 온갖 구멍을 막겠다 단언하고 시트지와 실리콘을 꺼내 들었다. 걔는 어디 갔을까? 무소식이 공포인 말벌을 궁금해하며 창문을 발칵 열었는데 방충망에 그분이 계셨다. 조용히 창문을 닫고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다음 날 마침 태풍이 왔고, 나는 자연의 편애 덕분에 평화롭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세상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 벌레 쫄보여서 지금은 바스러지게 말라 붙었을 (고) 장수말벌을 아직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 달갑지 않은 승리의 표식을 함께 치워 줄 친구만 열심히 찾으러 나다닐 뿐이다.

장수말벌이 창 틈에 전시되어있는 집의 7월에는 위서 물이 샜다. 윗 집 보일러가 터 것이다. 윗 집 세입자와 집주인, 우리 집주인과 부동산 사장님, 벽지와 곰팡이 아저씨와 침 튀기며 싸우는 동안  곰팡이 징그럽게 퍼져갔다. 거실에 나갈 때마다 일그러진 검은색 종자들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걸 수도 없이 올려다보던 2주 동안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우수수 쏟아져 정수리를 잡아먹을 듯 한 시커먼 천장이 보였다. 집주인네들 사이에 껴서 바짝 말린 명태 꼴이 되어 너덜너덜해졌다.

부드럽게 말하면 인상 좋은 호구가 되는구나, 온갖 촉을 날카롭게 세우고 지랄을 해댔다. 나는 모르는 게 많고 세상에 내가 상대할 사람들은 모두 전문가 같았다. 돈의 전문가, 농락의 전문가, 무시의 전문가, 소름 끼치게 능글거리는 전문가. 그때 친구들은 내가 뭐 하나 걸려라 하는 표정으로 울타리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개 같았다고 증언한다.


험악한 개새끼가 사는 우리 집 에어컨이 뜨끈한 바람만 내뿜었다. 설치가 잘못된 것이었는데, 여러 번 작동이 안 돼서 업자가 한 달에 걸쳐 세 번 다녀갔다. 속옷과 생리대 같은 것 들을 정리하며 수리 약속을 잡고 그들이 작업하는 동안 신경 쓰는 것도 퍽 불편했지만, 더 불편한 건 그중 한 사람의 무례함이었다. 업자 중 한 명은 우리 집에 쌓인 병을 보고 다음에 한 잔 하자고 했다. 더러운 손으로 집기들을 만지고 화장실을 썼다. 그의 오줌 소리를 들으면서, 뻔뻔한 표정을 보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치달았다. 두 번째로 에어컨이 안 될 때는 전화해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 올 때 그 새끼 데려오면 에어컨 파이프를 다 뜯어버리겠다고 했다. 딱 개새끼가 짖는 형국이었다. 전화를 끊고 정신을 차리니 온 진이 다 빠졌다. 빠른 속도로 험악해졌다. 내가 빠르게 배웠으면 했던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색이 다른 벽지 아래서, 얌전한 에어컨 옆에서 차근차근 귀여운 사고들을 해결하며 살았다. 때로 험악하고 주로 친절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기며.  그러다 어제, 냉장고가 고장 났다. 냉장고 밑에 닦아도 닦아도 물이 흐르길래 무슨 마르지 않는 샘물일까 하고 열었더니 냉동실에 있던 것들이 죄다 녹아내리고 있었다. 식재료를 상자에 넣어 베란다에 내놨지만 하필이면 이번 겨울은 춥지 않다. 이번엔 자연이 내 편이 아니, 통장은 얼어붙어있는데 냉장고를 고쳐야 다. 냉장고를 샀던 중고가전 업체에 연락하니 답장이 세월아 네월아 더디게 왔다. 내일 늦은 밤에나 연락드릴게요 한 지 이틀. 속이 바짝바짝 마를 때 동안 상자에서 음식 상하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지경이 상태가 되기 전에 눈을 돌려야 했다. 냉장고고 음식이고 내 성격과 마음까지 상해 악취를 풍길 것 같았다. 망치듯 내팽개치고 집을 나섰다. 이태원의 북적거리는 바에 가서 미친 듯이 놀았다. 그렇게 미치는 것보다는 이렇게 미치는 게 내 취향이었다. 아침까지 몸을 흔들다가 친구네 집으로 갔다. 비교적 무탈한 그곳에서 씻고 나왔는데 친구가 애인이랑 통화로 싸우고 있었다.

아, 탈은 어디에서고 난다. 피곤한 나는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친구가 이 상황과 관계를 해결하도록, 오늘을 책임지고 견디도록 도울 길은 하나였다. 조용히 윗도리를 갈아입고 바지 지퍼를 잠갔다. 축축한 양말을 신고 친구에게 애쓴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고 집을 나다.

루를 이르고 바트게 시작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해 뜬 거리를 걸었다.  걸음 소리가 이상해서  밑창을 봤더니 오른쪽 굽이 나가 있었다. 또각-텅 또각-텅 괴상한 소리를 내며 서쪽으로 향했다.

이어 등장하는 삶의 불청객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한다. 초대한 적 없어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도 파티를  이상 책임은 오롯이 내게 있다. 1인분의 삶을 겨우 해 먹는 게 이렇게 어려울 지 몰랐다.  아무것도 안해도 일은 터지고 숨 쉬고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품이 든다. 이제 이런 일을 하소연하기에는 부끄러운 나이가 됐고 쇳소리 없이 묵묵히 해 내기에는 여전히 미숙하다. 뭣도 몰라도 일단 두 팔 걷어부칠 수 밖에 없다. 자,이제 돌아가자. 내 손아귀에 있는 엉망으로 들어가자. 눈을 피했던 전장을 해결하러 가자.


고장난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아늑하고 서러운 우리 집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2019년을 함께 배웅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