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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Apr 25. 2020

가만히 안겨서 빠져들던 생각의 바다

따뜻하고 불편한 무력감 속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그 시간을 좋아했다.

가만히 안겨 천장이나 가슴팍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나랑 같이 자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끌어안고 자려했고, 보통 그 몸을 나도 좋아했으며, 다들 잠이 많았다. 잠이 없는 이도 내 옆에서는 하루 종일 무력하게 꿈자리를 헤맸고 전날 하도 과음을 해서 부둥켜안고 하루를 째로 해장에 쏟아붓는 날도 적지 않았다.

잠귀가 밝고 잠자리에 예민해서 늘 옆사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감은 눈에 입을 맞추고 장난을 쳐봐도 옅은 신음소리와 함께 주변에 잡히는 나를 끌어다 안을 뿐, 그들은 나를 빌미로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듯했다. 물론 꿈속에서.

자는 얼굴이 또 싫지는 않아서 깨우기보다 재웠다. 말랑하고 따뜻한 잠결 인형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가만히 있기. 핸드폰을 만지거나 품에서 빠져나오면 어찌 그리 철석같이 아는지, 에너지 소비라고는 숨 쉬기밖에 없는 상태로 몇 시간을 기다리곤 했다(시계를 볼 수 없으니 정확한 시간은 모르고 체감보다 약간 부풀려서 생색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럴 때면 생각 속에서 헤엄쳤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중요한 일과 깜박한 일과 사소한 일을, 걱정과 기대와 상상을 머릿속에 풀어헤쳐놓고 정신없이 생각의 바다에서 유영했다. 부드러운 파도를 따라 굽이굽이, 낮과 밤과 정조와 해일을 겪으면서 물결이 떠미는 대로 가닿은 생각들에 머물다 홀연히 떠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어진 시간에 몸은 부동하고 뇌는 바지런했다. 생각만으로는 후회할 일도 부스럼 날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충분히 기쁘고 재밌고 슬프고 궁금할 수 있다. 푹 빠져도, 중독돼도 괜찮은 뒤탈 없는 유흥 속으로 들어가 천장 무늬나 티셔츠 조직 같은 걸 보면서 바쁘고 여유롭게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을 좋아했다. 따뜻하고 불편한 무력감 속 아무도 모르는 내 풍성한 시간을.

 

옆 사람이 일어나 겨우 끼니를 때울 때면 현장학습에서 돌아와 재밌는 이야기를 풀듯, 기억에 남은 몇몇 조각을 건져 요상한 질문을 던지거나 재밌는 공상을 얘기했다. 그러면 같이 요상하게 진지하고 재밌게 고민하고.

요즘은 생각하는 시간이 없었다. 바쁠 땐 정신없다가도 짬이 나면 곧바로 핸드폰을 쥔다. 알고리즘이 나를 이끄는 대로 손가락에 채워진 수갑에 질질 끌려 몇 시간도 그냥 흘려보내곤 한다. 시간을 쓰고 싶은 곳과 쓰는 곳이 너무도 다르다.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렇다.

지하철에서도 집안일을 할 때도, 심지어 씻을 때까지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뭔가를 보고 듣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처럼 빨아들이기만 하고 소화는 뒷전으로 미뤘다. 뇌에도 장이 있다면 내 뇌는 필히 내장비만에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그제야 빨간불이 켜졌다. 핸드폰을 다른 방에 두고 빨래를 갰다.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비로소 생각은 옥죄를 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알면서도 못하는, 사랑하면서도 소홀하곤 하는, 나의 기꺼운 유흥에.

이제는 억지로 무력해질 일이 잘 없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간편하고 자극적인 무의식에 잔뜩 시간을 뺏긴다. 누군가 팔과 다리로 동여지 않아도 혼자서 잘 부둥켜안는 사람이고 싶다. 끊임없이 먹기보다 꼭꼭 씹어 소화하는 데 집중하고, 내 안에서 소화된 것들을 나누는 사람. 오늘은 혼자 모로 누워 천장을 보겠노라고, 가만히 신나겠노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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