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활여행자 Jan 02. 2020

인생의 5분의 1을 해외에서 살다

'생활여행자'의 시작 

  어릴 적부터 방랑의 기질이 있었다. 엄마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친척 언니를 따라 놀러 가서 저녁에 아주 호되게 혼이 난 날에도 혼나는 순간엔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새로운 동네에 첫 발을 디뎠던 그 설렘으로 가득했다. 


  태어나서부터 자란 집에서 대학을 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사를 해본 적 없이 한 동네에서만 쭉 붙박이로 살았던 나는 전학을 가고 전학을 오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학교가 집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순으로 가까워서 행동반경이 점점 더 줄어들다보니 가끔은 버스를 타고 1시간 통학하는 친구들마저 부럽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작은 나의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수능을 보고 대학을 지원하는 데 부모님께서 농담삼아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대학에 가게 되면 차를 사주시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 선택은 집에서 가장 먼 대학이었다. 


  20년 가까이 평생 살았던 둥지를 떠나 400km 떨어진 먼 곳으로 비행을 떠나는 느낌은 짜릿했다. 원래도 제 멋대로인 성격이었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대학에서 내가 직접 고른 교양수업을 듣고 동아리도 가입하는 그런 자주적인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처음 열쇠를 가지고 불 꺼진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느끼던 쓸쓸함은 하루 이틀 사이 사라지고 사투리도 고쳐지고 처음부터 서울에 살았던 사람인 양 잘 적응해서 살 게 되었다. 


  새내기 시절을 만끽하던 6월의 어느 날, 지도 교수님과 면담팀이 함께 하는 식사자리가 있었다. 신입생들이 대학에서의 첫학기를 알차게 보냈는지 이야기하고 첫방학 계획도 묻는 그런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나의 지도 교수님은 그 해에 학생처장이셨는데 중국 대학과의 첫 교환학생사업을 맡고 계시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유학이 그리 보편적이진 않았고, 나의 전공 특성상 중국어는 거의 필요가 없었던 터라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가기로 했던 4학년 선배 1명 마저도 최종 선발 후에 포기를 해서 교수님의 입장이 꽤나 곤란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1학년들도 이런 좋은 기회가 있으니 너무 졸업을 빨리하는 것에만 신경쓰지 말고 도전해보라는 말씀에 덥썩, 1학년이라도 괜찮다면 제가 가겠노라 말을 뱉어 버렸다. 교수님도 동기들도 깜짝 놀랐고 나는 큰 계획이나 포부도 없었다. 

‘나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단순한 호기심만 있는 상태였다. 20살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용감했고, 무모했다. 부모님께는 교환학생 신청해서 선발되었기 때문에 무조건 가야한다고 했고, 지금까지도 선발되어 교환학생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계신다. 


  이것이 첫 해외 방랑의 시작이었고, 이후 방랑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는 시간이었다. 지주라는 안휘성의 작은 도시는 교환학생에게는 최고의 도시였다. 한국어를 쓰고 싶어도 쓸 곳이 없고 그 때만 해도 아직 스마트폰은 커녕 인터넷도 쉽게 쓸 수 없을 때라 자연스럽게 한국과의 연락도 최소한의 생존보고 수준이었다. 학생은 2명인데 교수님이 듣기 말하기, 문법, 작문으로 3분, 어학환경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말은 못 하는데 한자는 조금 쓸 줄 아는 이상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그 대학, 아니 그 도시의 유명인이었다. 다양한 학과의 행사에 초청 받거나, 지역 신문 인터뷰, 유학생의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보자는 제의도 받았다. 스무 살의 하루하루는 생활여행자로서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1년의 알찬 중국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베이징 올림픽으로 중국의 위상도 전보다 높아지고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이 많아졌다. 그 인기에 힘입어 중국어 동아리를 운영했다.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나는 학생들이나 중국으로 연구년을 보내러 가시는 교수님들에게 도움이 되고 나도 그 덕분에 해마다 해외에 있는 재외교육기관으로 교육봉사를 다녀올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 때 어렴풋이 교사가 되면 한국에서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도 새로운 경험을 쌓으며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겠다 싶었다.

 

  학생 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임용 시험을 치르고 발령을 받고 나니 신규교사로서 학교에 적응하고 학급살이를 꾸려나가느라 무언가를 준비할 여력이 없이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디든 신입은 비슷한 어려움이 있겠지만 학교라는 사회는 내가 적응하는 것에 10만큼의 에너지가 든다면 무언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데는 100만큼의 에너지가 드는 곳이었다. 그 완급조절을 배우고 아이들과 복작대며 지내다 보니 또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사람인마냥 잘 적응하고 지냈다. 말씀하신 분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이제 2년차라고? 나는 너무 편하게 있길래 한 5~6년차는 된 줄 알았네.”

라는 말을 적응을 잘 한다는 칭찬으로 들었다. 적응력 하나는 자랑할만한 나니까. 넌 사막가면 선인장으로 김치도 담그고 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진담으로 받아들였으니까.


  그렇게 3년이라는 경력이 쌓이고 나니 대부분의 재외한국학교에 지원서는 낼 수 있게 되었다. 지원서는 한번에 1곳 밖에 넣을 수 없으니 경험삼아 올해 가장 많이 뽑는 학교에 지원해보자 했다. 그곳이 나의 두번째 해외살이를 하게 된 베트남이었다. 처음에 2년만 있을 예정이었으나 그곳에서 맡았던 업무의 연장으로 1년이 늘어났다. 이제는 한국으로 가야겠다 마음 먹고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대만의 한국학교 채용공고를 보는 순간 마음이 동해 다시 대만에서 2년 거주를 하게 되었다. 사실 나에게 있어 한국이든, 베트남이든, 대만이든 거주하는 나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를 설레게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가장 최근에 영화관에서 보았던 한국영화 '기생충'에서 배우 송강호의 대사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무엇인 줄 아니? 바로 무계획이야.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는 것이 인생이거든. 그래서 사람은 계획이 없어야 한다."에서 무릎을 탁 쳤었다. 궤변같이 들릴 진 몰라도 무계획이기에 그 순간에 내가 가장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5년의 해외생활을 하게 된 기저에는 무계획이 깔려 있다. 큰 계획없이도 인생의 5분의 1을 한국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다시 어느 나라로 가야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막연하게 또 어딘가로 떠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인생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날 기회가 오면 떠나보는 것이다. 떠나기 전의 걱정보다 막상 떠났을 때 새로운 곳에서의 설렘이 더욱 크다는 것은 떠나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가 없다. 누군가가 해외로 떠날지 말지 망설이고 있다면, 나의 조언을 구한다면 힘껏 등을 떠 밀어주고 싶다. 지금 떠나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