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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어 Mar 13. 2024

5월의 편지

2023, <무토와 미토>


5월이 끝나간다. 짧은 봄이 가는 게 아쉬워 눈시울을 붉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별로 그렇지도 않은 거 같다. 봄은 다시 올 테니까, 그리고 봄은 아프다. 나를 아프게 하는 봄은 별로다. 푸릇한 여름이 습하고 짜증이 나더라도 더 나은 거 같다. 여름은 아프지 않으니까. 결혼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는데 하게 된다면 5월이 좋을지 10월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이번 5월을 보내면서 확실해졌다. 5월은 아닌 거 같다. 5월은 그다지 상쾌하지 않다. 모든 일에 점점 무미건조해지는 거 같다. 이런 내 모습이 가끔씩 슬프지만, 싫지는 않다.

 

지난 편지에 언급된 전 애인에 대한 글..은 그대로 실리게 될 거 같아. 약간의 수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거의 달라진 것은 없어. 뻔뻔하게 살자는게 요즘 내 모토니까 그대로 이루려고 해. 어차피 지인들에게 많이 보여줄 거 같지도 않고, 같이 글 쓰는 사람들이 그 글로 내적 친밀감을 가져주는 듯해서 어느 정도는 만족스럽고, 용기도 얻었어. 아무래도 그 글이 모두가 한번쯤은 느껴본 아주 아주 일반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듯해. 그래도 그 글이 실제로 종이에 인쇄가 되어 책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할 때면 늘 얼굴이 뜨거워지기는 하는데, 아무렴.. 이것도 다 경험이 되는 거겠지.

 

그리고 최근에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어. 평범하디 평범한 한국 남자인데, 나한테 잘 해주고, 눈치 빠르고 센스가 있는 사람이야. 같이 있으면 재밌고 편안하고 계속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시작하게 되었어. 좋아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 막 끌리고 소유하고 싶은 그런 감정은 아니지만 편안함 속에서 설렘을 느껴.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 애인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데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서툴고 어렸는지 알겠더라. 그러면 슬퍼지기도 하고, 그냥 잘 지냈으면 싶기도 하고, 미워지기도 하고, 고마워지기도 해. 이 연애는 언제까지 이어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누릴 거 누리면서 단순하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야. 나중에 내가 상처를 받게 된다면, 같이 술이나 한잔 먹으며 위로해주길 바랄게.

 

아무리 뻔뻔스럽게 살자는 모토가 있다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닐까 싶은 때가 종종 있다. 어차피 학원 사업은 돈이 되는 일은 아닌 거 같아서, 애들이 늘어난다 해도 돈을 더 버는 거 같지는 않다. 내가 운영을 못하는 건지 벌리는 돈이 있지는 않고, 힘들기는 힘든데, 사고 싶은 건 많고, 연애도 해야겠지 외로운 것도 못 견디겠어서 약속은 늘지. 피부 관리도 받고 싶지. 여행도 가고 싶지. 그래서 점점 신용카드의 노예가 되어간다. 그렇지만 소비는 줄일 수 없다. 그렇지만 여유 있는 척은 또 해야겠다. 궁핍한 건 부끄러우니까. 일은 계속 하니까 벌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점점 더 뻔뻔해진다.

 

순수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가도 남들을 보면 더 그래도 될 것만 같다. 내가 느끼기에 내가 아무리 순수하지 못하다 해도 남들보다는 나은 거 같거든. 내가 아무리 불순하다 해도 남들보다는 착한 거 같거든. 세상의 모든 나르시스트들은 본인이 선하다 여기겠지. 모든 일에 뻔뻔스럽고 당당하겠지. 당당함과 뻔뻔함의 차이는 무엇일까. 선행에 대한 너의 글을 보며 몹시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 거다. 천성이 손해보기 싫고, 계산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듯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순수하다는 걸까. 부끄러운 줄 안다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면 되는 것일까.

 

경주는 잘 다녀왔어. 외박이나 여행을 많이 못 다녀본 욕심 많은 친구랑 간 거여서 걱정이 많았는데, 서로 서로 예민한 부분 눈치 봐가면서 이해하고 이해해주면서 아름답고 어른스러운 장면을 많이 연출하고 돌아왔어. 친구가 잠깐 최근 받은 정신과 치료에 대해 언급을 하기는 했지만, 깊게 들어가지 않았고, 내 얘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어. 불행 배틀처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고, 그냥 옆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피곤해지기 싫은 마음도 물론 있었기 때문이야.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그만큼의 에너지도 쓰고 싶지 않은 이 모순을 가끔씩 견디기 힘들어. 그래도 이 만큼의 마음을 쓰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거라며 합리화하면서 또 하루 하루를 살아가겠지.

 

총명한 눈빛을 갖고 싶다. 밝은 에너지로 세상을 밝히고 싶다. 그렇지만 현실의 나는, 거울 앞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소비를 컨트롤 하기 힘들고, 성욕과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세월을 보낸다. 이 과정 속에 자기 위안과 합리화는 필수조건이다.



202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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