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정보학자의 과거, 현재와 미래
필자의 직업은 인터마운틴 헬스케어의 Medical informaticist입니다. (조직 내부적으로는 Associate, Staff, Senior, Consultant, Director의 레벨로 나눕니다) Medical informaticist는 병원 또는 기업 등에서 의료정보학의 연구, 개발, 프로젝트 관리 등을 수행하는 직무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상당히 힘든 단어이며 (의료정보학자 정도??) 사실 영어로도 일반적인 단어는 아닙니다. 일단 타이핑하다가 t 와 i 를 헷갈리는 건 보통이고 제대로 써놓아도 MS 워드 등에서는 오타로 인식합니다. LinkedIn이나 GlassDoor에서 검색해보면 저런 타이틀로 사람 뽑는 곳은 일년에 몇번 정도만 포스팅이 나올 정도로 희귀합니다. 왠만한 의료기관의 HR 사람들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 필자도 잊을만하면 Medical assistant, Medical recorder, Medical engineer 추천 좀 해달라고 연락이 오곤 합니다. 게다가 친구나 가족 친지 등에게 Medical informaticist가 무슨 일을 하는지 간단하게라도 설명하려면 만만치 않습니다. 아빠는 그냥 회사다녀
이전 글에서 언급한 옛날 옛적 Homer의 시대에 의료정보학은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의사들이 하는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 또는 취미생활과도 같았습니다. 따라서 의료정보학을 연구했던 초창기 멤버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 자기 직업을 이미 갖고 있으면서 컴퓨터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낮에는 환자를 보거나 일하고 밤에는 모여서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배우며 프로젝트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야가 초창기에는 대체로 그렇듯이 이 시기는 개인적인 관심에 기반한 활발한 참여,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빠른 학문의 발전 속도에 힘입은 짧은 프로젝트 사이클과 성과의 축적, 같은 컴덕후끼리 평등한 관계에 기반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Stan Huff는 이를 원탁의 기사, 카메론의 시대였다고 회상하는데, 아더왕의 원탁은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며 각자 모험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자신이 겪을 일들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비유한 듯 합니다.
이 시기를 지나고 각 대학들에 Medical informatics 학위과정 (주로 대학원)이 개설되기 시작되며 보다 체계적인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연히 초창기의 수강생은 극히 적었습니다. 전 인터마운틴의 CEO였던 Charles Sorenson은 회상하기를, Homer의 첫 수업에 학생은 자신을 포함해 단 두명이었으며 그럼에도 수업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수업이 이미 의학의 기초가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초창기 교육의 목표는 컴퓨터에 대한 지식과 활용법을 추가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의과대학 출신이 아닌 다양한 학부 출신의 대학원생도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후 50년동안 이어질 의료와 엔지니어링 도메인 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시작됩니다.
교수: (아니 전자공학과 출신이 수업에 들어오다니, 아무래도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지) 첫수업이니 오늘은 RICU 환자의 confusion, sedation, pain compliance를 계산하여 테이블로 출력하는 코딩을 해보자. pain은 4시간, 나머지는 2시간마다 credit을 주고 나이트는 한번만 보는 걸로 하자. 칠판에 다 써놨다. Ventilation은 신경쓰지마라. 질문있니? (학부수업도 아닌데 너무 쉬운가, 빨리 끝나면 하나 더 내줘야지)
학생: …………………………
교수: …………………………
실제로 유타대학 Medical Informatics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은 대학원생중 하나였던 Reed Gardner는 전자공학 학부 출신이었는데, 지도교수였던 Homer는 그를 의대의 생리학 수업에 보내 똑같이 학점을 받도록 했다고 합니다. Reed는 이 수업에서 C+를 받았는데 그가 평생동안 받은 학점중 C+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교수님 정말 저한테 왜이러세요
현대의 Biomedical informatics는 Bioinformatics와 Public health informatics 등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융합학문분야가 되었지만, 그 핵심은 Clinical informatics로서 임상 데이터의 수집과 저장, 가공을 통해 의료인의 의사결정을 지원함으로서 Patient outcome을 증진한다는 목표에 오랫동안 촛점을 맞춰 왔습니다. 이러한 Clinical informatics에서는 의료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고, 이 과정에서 임상정보의 부족 또는 미흡함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을 인식하며 (또는 이미 제기된 문제들을 해석하며), 이 필요성을 정보학적인 관점에서 요구사항으로 변환한 후 (Transformation), 적절한 정보학 솔루션을 제공하여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실제로도 구현 (Practice)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의료와 엔지니어링 양쪽의 깊이있는 이해는 필수이며 학교에서 많은 현장실습 기회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업에서도 항상 의료인들과 소통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Clinical informatics의 영역과 핵심 요소들은 Reed Gardner의 JAMIA White paper에서 잘 정의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학생들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amia.org/sites/amia.org/files/AMIA-Clinical-Informatics-Core-Content.pdf
세월은 흘러 체계적인 의료정보학 훈련과 학위과정을 거친 학생들은 드디어 Medical informaticist가 되어 세상에 나가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했지만 요약하자면 초창기의 주요 기여는 다음과 같습니다.
Electronic health record의 설계와 개발, 운용, 개선
Standard terminology와 information model
Clinical decision support system
Computerized order entry
Clinical knowledge / content management
이 시기에는 Epic, Cerner 등 상용 EMR 벤더들도 없거나 시장 자체가 미미했기에 많은 병원들은 자체적으로 EMR 시스템을 개발하였고, Informaticist 들은 주로 병원에 소속되어 의료인들과 함께 EMR 시스템의 이론적인 토대, 특히 용어체계 및 정보모델을 개발하는 데 큰 공헌을 합니다.
1990년대부터는 획기적으로 발전한 Bioinformatics와 Genomics를 임상에서 활용하는 가능성이 열리면서 대학의 Medical informatics 학과들이 이쪽분야의 커리큘럼을 흡수하며 Biomedical informatics로 통합 및 개명하기 시작합니다. (여담으로 이 바뀐 명칭을 정체성을 흐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또한 Medical informatics의 영역도 EHR 중심에서 Translational science, Clinical research informatics, Population health, Revenue cycle, Payment model, Business process management, Mobile health, Big data analysis, Artificial intelligence and machine learning 등 너무 다양한 분야로 확대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Medical informaticist의 역할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연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Clinical informatics분야에서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된 여러 배경 중에서도 큰 요인은 병원들이 더이상 EMR을 개발하지 않고 상용 EMR을 구매하여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원인은 간단히 말해 비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10개의 병원에서만 쓰게 되는 경우와 이를 상용화하여 1000개의 병원에 도입하여 쓰는 경우의 비용은 규모의 경제 효과때문에 당연히 후자가 저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도 EMR이 비싸다고들 아우성인데 그렇게 된 이유는 따로 한 파트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000년대 이후 메이저 헬스케어 시스템들의 EMR 도입 현황을 보면 이제 미국내의 왠만한 대형병원들은 대부분 상용 EMR 시스템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병원이 더이상 자체 EMR을 개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Medical informaticist가 EMR에 대한 주도권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MR 개발사에서 일하는 경우는 어떤가하면, 재미있게도 EMR 벤더들은 Medical informaticist를 뽑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상용 EMR시스템에 대한 지식은 그 개발회사의 컨설턴트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설사 Medical informaticist가 열심히 공부해서 쫓아갈 수는 있다 쳐도 비용 문제에서 여전히 경쟁력이 없습니다. Medical informaticist는 기본적으로 MD/PhD급의 포지션이라 쓸데없이 샐러리가 높습니다. 물론 컨설턴트들도 쓸데없이 비싸긴 하죠
여기에 더해서 아이러니하게도 Medical informaticist의 의료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오히려 전보다도 못하다는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많은 경우 Medical informaticist들은 의과대학에 적을 두고 연구를 함께 하는데, 여기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수록 정작 임상 근처에서 일할 시간이 적어지게 되고 물리적으로도 현장에서 멀어져 연구실, 회의, 학회, 컴퓨터 앞에서 보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Medical informatics 분야가 워낙 방대해지다보니 PhD급을 키우는 시간과 비용은 점점 더 커져서 차라리 임상의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훈련만 집중적으로 시킨 후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인식이 퍼집니다.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것은 대학의 책임이 크다고 보는데, 최근의 Biomedical informatics 커리큘럼을 보면 지나치게 광범위한 분야를 커버하기 위해 맛보기식으로 배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커질수록 Medical informaticist의 비전이 보이지 않게 된 이들은 더 연구쪽에 집중하여 아예 학교에 가 교수의 길을 가거나 정부기관, 컨설팅 업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래의 Medical informaticist의 역할과 이들이 어떤 가치를 제공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시기가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Medical informatics는 컴퓨터, EMR, 또는 IT에 기반한 분야이거나 이것들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Reed Gardner는 오래전부터 아래와 같이 강조해왔습니다.
즉 기술은 도구일 뿐이며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은 Sociology라는 것입니다. 교수님 학과설명회때는 그런말씀 안하셨잖아요 저 슬라이드에서 Reed는 Sociology라고 통칭하였지만 필자는 그 안에 요구공학적 접근, 비즈니스 프로세스 관리와 개선, 서비스 기반 아키텍처 등의 개념들이 가득하다고 봅니다. 오늘날 병원은 더이상 SW개발자를 고용하지 않으며 EMR을 개발하지 않습니다. 마치 애플이나 퀄컴이 자체적으로 공장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컨대 의료정보학이 제공하는 가치는 의료정보 시스템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임상 현장에서의 정보학적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정보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데서 나온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한 도구로서의 정보시스템은 자체개발 시스템이든 상용시스템이든 클라우드 기반 시스템이든 기술이 발전하면서 바뀔수 있지만 이 기본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는 새로운 개념도 아니고 오래전에 컴퓨터를 의사결정지원의 도구로서 떠올렸던 Homer의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짧은 소견이지만 Medical informaticist의 미래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