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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라 Mar 03. 2024

꿈은 잊혀지고 실패만 남았다

욜로하다 골로갔네 미리보기 03

꿈은 잊혀지고 실패만 남았다.


30살 유럽여행 중 포르투갈 카스카이스에서 스쳐 지나듯 만난 여학생과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나는 포르투갈의 관광지인 신트라를 둘러보고 카스카이스의 해변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비수기였기에 사람은 별로 없었고 여행 온 그녀와 마주쳤다. 우린 서로의 얼굴에 ‘한국 사람’이라고 써있는 듯 한국인임을 알아봤고 가볍게 여행자들의 스몰 토크를 나눴다. 리스본은 어떤가요? 어디 맛집이 있나요?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여행 경비에 대해 물었다. 


“와 2개월 넘게 유럽 여행 하고 있다고요? 돈은 얼마나 들었어요?”

“음, 항공권까지 다 포함해서 대략 천만원 든 거 같아요.” 나는 솔직히 얘기했다. 

“오, 저도 여행 경비 천만원인데.”

대학생이 어떻게 천만원을 모았을까 궁금해서 물었다. 

“전 6개월 계약직으로 일하고 모은 돈으로 유럽 왔어요. 님은 여행 경비는 어떻게 모았어요?” 아마도 부모님의 지원일거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도 6개월 간 이마트에서 알바했어요.” 


그녀가 대단하게 느낀 건 대학교를 다니면서 알바를 했다는 점이다. 오후 4시까지는 학업을, 5시부터 11시까지는 알바를 했다고 한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닐텐데 여행을 위한 그녀의 열정에 감동했다. 

포르투갈 카스카이스. 여기서 그녀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11년 전의 모습. 포르투갈, 카스카이스.


대학 시절 그토록 원했던 세계여행은 안 다니고 무엇을 했던가. 요즘은 대학생들도 해외여행을 많이 다닌다. 저가 항공의 활성화와 최저임금 인상, 원화 가치 상승 등 해외 여행의 부담이 과거보단 많이 줄었다. 하지만 내가 20살 때는 최저 임금이 시간당 2400원이었고, 항공권은 꽤나 비쌌다.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공사장 알바를 2개월간 한 적이 있다. 당시 일당은 6만원이었고 20일을 일해 두 달간 240만원을 벌었다. 군 전역 후 방학 때 이마트 알바를 했을 땐 월급 약 105만원을 받았다. 나름 아시아 여행 정도는 다녀올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었으나 다음 학기 생활비로 써야만 했다. 세계 여행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학교 생활에 충실한 평범한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당시 사범대에 입학하면 1~2학년 때엔 적당히 놀고 군대를 다녀온 후 3~4학년 때 집중적으로 임용고시에 매진하였다. 나도 세상이 펼쳐 놓은 주어진 길에 동참했다. 학교 중앙 도서관이라는 동굴로 들어가 전공 윤리 집중 수련을 하였다. 함께 시험을 보는 동기 선후배들과 스터디도 하고 식사 시간이 오면 학식을 먹었던 수험생의 시간들.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도서관에 가두었다. 해외는 커녕 제주도 갈 여유도 없었다. 


심지어 임용 시험의 결과는 쓰라렸다. 첫해 시험 쳤을 때 윤리 임용 경쟁률이 20대 1이 넘었다. ‘그래 재수는 기본이지 뭐.’ 쿨하게 생각했고 1년을 더 시험을 준비했다. 두 번째 시험은 잘 볼 거란 나름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기막힌 일이 발생했다. 다음 해 시험 경쟁률이 무려 100대 1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9급 공무원 시험도 아니고 교원 자격이 있어야 치를 수 있는 시험이 100대 1이라니. 이유는 이러했다. 당시 교육과정 변화로 고등학교 사회, 과학 과목을 선택으로 바꾸었고, 인문계를 제외한 전문계 학교에 있던 윤리 과목은 사라졌다. 이로 인해 윤리 신규 임용은 오랫동안 심각한 정원 감소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시험에도 떨어진 27살의 1월, 나는 매우 절망스럽고 괴로웠다. 다음 해의 경쟁률도 100:1이 될지 모를 일이었고, 교직만 바라보다 다른 일로 돌려야 한다니 막막했다. 어둠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심연으로 빨려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여기 사람 있어요’ 외쳤지만 바다 한 가운데 빠진 양 그 무엇도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청춘의 열병은 나를 잠식해만 갔다. 


더 이상 시험 치를 자신이 없었다. 그 무렵 20대 온라인 커뮤니티엔 호주 워킹 홀리데이가 유행했다. 워홀 생활을 통해 영주권을 받고 호주에 정착한 사람, 1년간 돈을 크게 벌어 세계 여행을 떠난 사람 등 성공 사례가 속속 등장했다. 잊었던 세계 유랑의 꿈이 꿈틀댔다. 결심했다.


‘그래. 호주 워홀이야!’ 비록 영어는 별로 못하지만 농장에서 1년간 일하며 모은 돈으로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호주 워홀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젠장, 수중에 돈 100만원도 없다니. 워킹 비자만 30만원이고 호주 편도 항공권이 60만원 이니까 만약 간다면 땡전 한 푼 없으니 거지 직업을 먼저 하겠군!’ 


당시 백수였던 터라 돈은 없었고 결국 워홀은 깔끔히 마음 접었다. 워홀은 잊혀진 방랑의 꿈이 슬며시 떠오르는 계기였다. 그러나 당장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마침 S고등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와달라고 연락받았다. 


주 15시간 수업하는 시간 강사로 첫 학교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한 해 근무를 마치고 나니 시간 강사의 1년 소득은 800만원이 안 되었다. 생활비를 쓰고나니 또 워홀 갈 돈이 없었다. 다음 해 일산의 어느 중학교에 2개월 근무를 하였고, 계약이 만료되고 다른 중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가서는 안 될 학교에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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