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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 숨쉬는 그녀 Jan 26. 2021

나의 시리아 친구들은 안녕할까?

레바논 베이루트 여행

새벽부터 내리는 비. 거실에서 바라보는 금정산은 안개로 자욱하다. 창문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2년 전 1월. 레바논 베이루트 여행의 한때가 떠오른다. 여행 내내 눈과 비가 내려. 렌터카를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이동이 힘들었던 베이루트. 레바논 여행을 떠올리며 썼던 지난여름의 글을 올려본다.        


   



나의 시리아 친구는 안녕할까?        

  

아침 신문에서 코로나로 인해 닫힌 국경 근처에서 양 떼를 몰고 서성이는 유목민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7천 년 동안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유목 생활을 해온 북아프리카의 모리타니 유목민이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시리아 친구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베이루트 북쪽 간이 카페. 세상 어디로든 자신들을 받아줄 곳을 찾아 월경을 꿈꾸던, 눈바람 속에서 커피를 나르던, 시리아 전통 노래로 환영해주던 내 친구들은 안녕할까?     


2019년 1월. 레바논 여행 3일째. 고대 로마 유적지가 잘 보존된 발벡과 바이블의 어원이 된 고대도시 비블로스를 여행하려고 베이루트의 숙소를 나섰을 때다.      


베이루트 외곽에 이르자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비가 눈으로 변하더니 산자락이 눈으로 뒤덮였다. 곧 차량을 통제하는 군인들을 만났다. 스노체인을 갖춘 차량만 통행할 수 있었다. 렌트 차량이라 스노체인을 갖추지 못한 나는 하릴없이 되돌아와야 했다. 고갯마루에 간이 카페가 보여 차를 세웠다. 베이루트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비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서 전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몸을 녹일 생각으로 간이 카페에 들어갔다. 엉성한 비닐 천막 틈으로 눈바람이 숭숭 들어와 한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카페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곳이었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이에요.”     


20대의 청년 세 명이 주인인 듯했다. 궂은 날씨라 손님도 별로 없는 데다 한눈에도 외국인으로 보여서인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같은 이방인의 처지여서 그랬을까? 그들은 대뜸 시리아 사람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시리아…‥. 갑자기 내 마음이 요동쳤다.‘여행 금지국, 알레포, 내전, 난민......’내가 아는 시리아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난민 캠프에서 봉사 활동을 한 딸아이가 들려주던 시리아 사람들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그들이 남 같지가 않았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떠날 생각이었던 나는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을 보냈다.      

“언제 이곳에 왔어요?”

“2년 전에 왔어요.”

“가족 모두 같이 왔나요?”

“아니요. 가족들은 시리아에 있고 우리만 왔어요. 이쪽은 제 동생이고, 저쪽은 제 친구예요.”

“함께 이 카페를 운영해요?”

“아니요. 카페는 제 동생 혼자서 운영해요. 우리는 학생인데, 시리아에서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어요. 저와 친구는 뮤지션이에요.”     


떠듬떠듬한 영어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비와 바람과 안개 사이로 이야기가, 웃음이, 노래가 오갔다. 베이루트에서 겨우 70km 떨어진 다마스쿠스에 남겨진 가족의 얼굴이, 내전의 위험으로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도는 친구들의 사연이 그들이 내민 따뜻한 차 한 잔에 녹아 있었다. 즐겁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동안에 아린 마음의 표정이 드러날까 봐 마음 자락을 다잡아야 했다.     


진심어린 환대에, 눈도 비도 비껴간 천막 카페의 한때였다. 


간이 카페는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 베이루트 북쪽을 드나드는 길목이었고, 날씨가 좋으면 베이루트 전망을 한눈에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궂은 날씨에도 간간이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운전자들은 주로 차 안에서 주문을 했고, 청년들이 음료를 차에까지  배달했다. 그들을 대신해서 내가 커피 주문을 받아주기도 했다. 찻값은 겨우 600원 정도였다. 하루에 100잔을 팔아도‘중동의 파리’라 불리는 베이루트 시내에서는 한 끼 밥값에 불과했다.      


“아쉽지만,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아쉬워요. 레바논을 떠나기 전까지 매일 와요. 우리 집에도 놀러 가요. 카페에서 멀지 않아요.”

“그래요. 내일도 올게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시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들과 나누어 먹을 요량으로 빵과 과일, 피자 한 판을 샀다. 이번에는 청년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전날보다 더 세찬 비바람이 천막 사이로 스며들어 바닥은 물로 흥건했다. 청년은 조끼와 스웨터, 파카까지 입었고 모자를 써서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카페 안은 추웠다. 지나가는 차도 뜸하고 손님도 없어서인지 더 한기가 느껴졌다.      


두 명의 형과 다섯 명의 누나를 둔 막내라는 그는 러시아로 공부를 하러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 최저 임금이 얼마인지, 비자를 받는데 도와줄 수 있는지를 묻기도 했다. 생존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마음이 이야기에 묻어났다.      


“내일도 또 와요.”

“이제 못 와요. 내일 아침에는 차를 반납해서 오기가 힘들어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요.”     


우리는 페이스북 계정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시리아의 집에서 찍은 사진 속 그는 준수했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국경 없는 세계 시민으로, 장벽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레바논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의 준비로 살펴본 레바논은 상황이 안 좋았다. 코로나의 위험은 생각할 겨를도 없는 국가 부도 직전이어서 그곳에 거주하는 난민들을 향한 마음도 싸늘했다. 나의 시리아 친구들이 떠올랐다. 떠돌이 신세로 간이 카페를 운영하던 그들이 걱정되었다.      


코로나의 시간. 출입국마다 체온을 재고, 인적사항을 적는 검문을 경험하며 이보다 더한 검문의 시대를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했다. 이 도시 저 도시,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거리고, 숱하게 국경을 통과하면서 가슴 조렸을 그들을 생각했다. 내게 코로나의 시간은 단절감과 함께 주변을 위로하는 마음도 키운 시간이었는데, 내 친구들에게는 어떤 시간이었까?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문이 좁아져서 더 힘들어지지는 않았을까? 내 시리아 친구들의 안녕을 기도해 본다.                     


        

베이루트 중심가에 겹겹이 쌓인 고대 로마유적, 교회, 성당, 이슬람 사원.
어린 쌍둥이 형제의 세례식에 함께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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