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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 숨쉬는 그녀 Oct 06. 2021

마음 한 조각을 묻고 돌아섰네

'붉은 사막'의 나라, 나미비아

‘죽음의 웅덩이’라 불리는 데드블레이(Deadvlei).

모래 속 철 성분 덕분에 붉은빛을 띠는 모래 언덕은 햇볕을 받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다르다. 500만 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 사막은 나미비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코스가 되었다. 

나미비아는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는 뜻을 지닌 ‘나미브’ 사막에서 국명을 따왔다. 우리나라 면적의 8배가 되는 국토는 대부분 황량한 사막이다. 붉은 사막이 눈앞에 나타났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라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이 떠올랐다. 도시를 뒤로하고 끝없이 달린 뒤였다. 거친 사막에 우뚝 솟은 모래 언덕. 철 성분이 많아 붉은빛을 띠는, 사막의 붉은 성채였다.     



모래 속 철 성분 덕분에 붉은빛을 띠는 모래 언덕은 햇볕을 받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다르다. 500만 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 사막. 

 

마음을 묻은 붉은 사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황무지 저 멀리 솟아오른 바위 언덕 사이로 하늘이 붉어 온다. 달리는 차 안에서 해돋이를 즐겼다. 드문드문 모래 언덕도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목적지가 가까운 모양이다. 나미비아 정부는 나미브 사막을 보호하기 위해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일부 구간만 개방한다. 그중에서 ‘붉은 사막’으로 불리는 듄(Dune) 45, 소수스블레이(Sossusvlei), 데드블레이(Deadvlei)는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한낮의 사막은 뜨거운 햇볕과 더운 바람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서 주로 이른 아침에 사막을 방문한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캠프사이트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붉은 사막의 일몰과 일출을 즐기면 좋지만, 숙박하기가 쉽지 않다. 캠프사이트는 늘 여행자들로 붐빈다.      


아침 7시. ‘듄 45’라 불리는 모래 언덕 아래에 섰다. 황량한 사막에 우뚝 솟은 붉은 모래 언덕이 신비롭다. 모래에 섞인 철 성분으로 인해 붉은색을 띤다는데, 자세히 보면 모래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이곳에는 숫자 이름을 가진 모래 언덕이 150개가량 된다. 이정표가 없는 사막이라 공원 입구에서부터 거리를 따져 모래 언덕의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듄 45’는 국립공원 입구에서 45km 거리에 있다는 의미다.      


모래 언덕을 올려다보니 발자국이 빼곡하다. 꼭대기에서 일출을 보고 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170m의 높이. 한달음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생각만큼 걷는 일이 쉽지 않다. 최대한 발바닥 표면적을 넓게 해 천천히 걸어도 발이 푹푹 빠져든다. 거친 호흡 끝에 드디어 꼭대기에 섰다. 칼날 같은 능선이라 무너져 내릴 것 같은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모래바람 덕분이다. 밤새 바람에 실려 온 모래가 쌓이며 발자국을 덮는다.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새롭게 탈바꿈하는 셈이다. 삶도 그럴 수 있다면, 자고 일어나면 내 삶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지울까?      


‘첩첩산중’ 대신에 ‘첩첩 사막’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까? 대서양의 넘실거리는 파도 같기도 한, 겹겹이 펼쳐지는 모래 언덕이 장관이다. 어떤 곳은 붉고, 어떤 곳은 검은 모래 언덕이 새파란 하늘 아래 빛난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과 하늘, 햇살이 만들어내는 장면이 경이롭다. 한동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말을 잃는다. 바람이 만들어낸 능선에 더러는 눕고 더러는 앉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붉은 성채. 무너지고 쌓이는 세월을 반복하며 적막함을 온몸으로 견뎌내었겠지. 사람들이 사라지고, 한낮의 열기도 사라진 밤이 오면, 모래를 몰고 온 바람은 아래로 아래로만 가라앉았을 테지. 무수한 낮과 밤을 순환하며 우뚝 선 붉은 모래 언덕에 남은 것과 사라진 것을 보며 내 삶을 돌아본다. 내가 떠나보낸 것과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침인데도 햇볕이 따갑다. 오래 있을 수가 없다. 모래 언덕을 내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마음의 짐이라도 내려놓은 걸까? 올라올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여든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내 앞을 걷는다. 무리와 떨어져 혼자 걷는 할아버지의 걸음이 느릿하다. 삶의 끝자락에 선 할아버지는 한 발 한 발 꾹꾹 눌러가며 무엇을 떠나보낼까? 무엇을 붙잡고 싶을까? 할아버지의 걸음에 나를 맞춘다.      


모래 언덕 발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사막에 산다는 가시나무다. 오래전 이곳에도 강이 흘렀다는 증거일까? 처음에는 부드러운 잎이었을까? 넓은 잎으로 그늘도 만들었을까? 강물이 마르면서 줄기가, 가지가, 온몸이 가시로 변했을까? 물을 찾아서 뿌리는 어디까지 뻗어갔을까? 가시나무 둘레를 거닐며 이리저리 뾰족하게 날 세우며 살았던 젊음의 한때를 떠올렸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온몸으로 모래 언덕을 기어오른다. 걱정 없는 얼굴이다. 500만 년의 나이를 지니고 우뚝 선 모래 언덕 앞에서는 삶의 끝자락에 선 할아버지도, 이제 막 삶을 시작하는 꼬마도, 반백의 나도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가시나무 곁 붉은 모래를 두 손으로 파 본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마음을 묻고 돌아섰다.    

 

나미브 나우프트 국립공원(Namib Naukluft National Park)의 세서림(Sesrim) 캠프사이트에서 하룻밤 묵은 후 ‘듄 45’에서 일출을 즐기는 것을 권한다.

    

‘붉은 사막’의 신비로운 매력에 빠진 사람들.


고독한 죽음의 웅덩이 


‘죽음의 웅덩이’라 불리는 데드블레이로 향한다. 400만 년 전만 해도 강이 흘렀던 곳. 모래바람이 불어와 물길을 막은 곳. 모래 언덕에 갇힌 강은 호수가 되고, 호수의 물이 마르면서 죽음의 웅덩이가 된 곳이다.      


325m의 높이 때문일까? 빅대디(Big daddy)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모래 언덕을 올랐다. 또다시 모래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걷는 일이 쉽지 않다. 듄 45를 오를 때보다 힘들다. 얼마나 걸었을까? 모래 언덕 아래로 분지가 보인다. ‘죽음의 웅덩이’로 불리는 곳이다. 하얗게 빛나는 분지가 눈부시다. 걸어서 내려가기에는 힘든 경사다. 온몸을 던져 구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일행들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붉은 모래 언덕과 하얗게 반짝이는 바닥, 검은 나무, 푸른 하늘. 묘한 색채가 대비되는 죽음의 웅덩이를 걸으니 다른 세계 같다. 드문드문 서 있는, 말라죽은 앙상한 고목. 나무들의 무덤. 강물에 기대어 300년을 살다가 바싹 말라 생명을 다했고,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이곳에서 600년 이상을 버티고 있다는 나무들. 서정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 「신부」 중에서     


미라가 된 나무.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다. 긴긴 세월, 무엇을 기다리며 버티고 있는 걸까?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강의 흔적과 모래 언덕, 말라죽은 나무가 만들어낸 독특한 풍경. 강렬한 태양과 붉은 모래와 흰 땅, 그리고 미라가 된 나무. 오랜 세월을 이겨낸 고독한 죽음의 웅덩이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미라 같은 나무들 사이를 걷는 순간은 삶의 원초적인 것들과 대면하는 시간이다.     

'빅 대디'를 오르는 사람들



'빅 대디'에서 내려다본 풍경. '죽음의 웅덩이'를 오가는 사람들.
뜨겁고 건조한 사막 기후로 인해 호수가 말라붙으면서 화석으로 남은 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서 있다.


언젠가 나미비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 붉디붉은 모래 언덕에 서면 넋을 잃을 거라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들어선 나라, 나미비아. 1억 5천 년부터 생명의 태동이 시작된, 가늠하기 어려운 사막 한 귀퉁이에 마음을 두고 온 곳. 언젠가 나는 그곳에 또 가야 할 것 같다. 느릿한 걸음으로 나미비아의 사막을 다시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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