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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연 Aug 24. 2023

[장애도] 성인 발달장애인은 어떻게 살아요?

시설 입소가 삶의 목표라면, 너무 우울해요!

아들이 학교 최고의 괴물에서 반 최고의 인기남으로 등극했던 ‘어느 해’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아들의 문제행동 소거를 위해 어떤 방식의 접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전처럼 괴물까진 아니지만 다시 공격 행동이 올라온 아들을 이해하고 그 행동을 소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팁’도 얻을 수도 있다. 


짜잔~ 하고 “아들이 이렇게 했어요”라고 결론만 딱 내놓으면 좋을 텐데 무슨 설명이 이렇게 길까.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않은 법이다.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겪으며 깨닫게 됐는지. 


나 혼자만 알고 있으면 안 되기에 글로 풀어낸다. 갈 길이 멀다. 지난 4~5년 동안의 기록이다.       


취재를 시작해 보자!     


5년 전 한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순회강연을 요청받았다. 아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깨달은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된다길래 “알겠습니다” 했는데 첫 강연을 마치고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강연을 들으러 온 대상자 상당수가 성인기 발달장애인을 자녀로 둔 선배맘이었던 것이다.      


물론 선배맘도 후배맘한테 배울 점이 있겠지만 그것만을 위안으로 삼기엔 부족했다. 아들이 초등학생이라 성인기 발달장애인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난, 마음이 위축되고 떳떳하지 못했다.      


주최 측에 이런 의사를 전달하고 나머지 일정은 다른 사람으로 바꿔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잘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잘해서가 아니라 홍보부터 팜플렛까지 미리 제작해 놨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힝. 잘하긴 뭘 잘해요. 선배맘들 무서워~. 나 지금 잔뜩 쫄아있는 거 안 보여요?”      

그만둘 수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데…. 


마침 나와 함께 순회 교육의 공동 강사로 임명된 사람은 정의당 장혜영 국회의원(당시는 장혜영 감독이었다). 발달장애인의 언니는 그는 당사자 성인기 삶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옷. 질 수 없어. 어떻게든 ‘어린이의 엄마’라는 한계를 극복해야 해.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래. 취재를 한 번 해 보자. 

(나와 같은 해 장혜영 감독의 책이 나왔기 때문일까? 이때 나는 장 감독에게 묘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일. 그게 뭐 그리 중요할꼬. 아이고! 철없던 과거의 류승연아). 

(아, 덧붙여 지금은 장혜영 의원과 아주 잘 지낸다)


대학 졸업 전 잡지사 기자로 취직해 명품의 세계 속에서 잔뜩 헤매다 신문사로 이직해 경찰서와 국회를 안방처럼 활보했다. 

친한 형사들 봉고차를 타고 당일 밤 급습 예정인 불법오락실 순찰에 함께하기도 했고, 조직의 일원인 문신 가득한 오빠에게 교도소 생활에 대해서도 들었고, 기사 내리지 않으면 정당 출입 막겠다고 협박하는 실세 의원에게 지금 언론 탄압 중이냐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싸우기도 했다.      


그 모든 경험이 적성에 맞았고 재밌었다. 아들이 발달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신문사 정치부장 자리에 앉아 기자들에게 호통치며 ‘썅년’ 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한 번 가진 탈렌트(talent)는 상황에 따라 잠시 잃을 순 있어도 사라지진 않는다고 했다. ‘아들의 엄마’로 오래 살면서 늙고 지치고 살찌긴(ㅜㅜ) 했으나 전투력은 훨씬 높아진 터. 

그래. 내가 가진 이 탈렌트. 장애계에 한 번 풀어놔 보자. 으르렁.      


인생의 목표가 시설 입소라면.     


노트와 펜을 챙겨 성인기 당사자, 당사자 가족, 당사자를 지원하는 사회복지사를 수시로 만났다.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고개가 갸웃거렸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엄마가 짐작했던 성인기 삶과 실제의 삶은 그만큼 달랐다.


우선 가장 놀랐던 건 성인기 발달장애인은 무조건 엄마(부모)와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부모)와 사는 발달장애인만 만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는 아예 만날 수조차 없었다. 

시설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동환이의 미래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나랑 살거나, 나 죽고 나면 시설에 들어가거나 두 가지 뿐인 거야? 뭐 다른 길은 전혀 없는 거야?”     


마침 내 주변에는 자식의 자립을 준비 중인 선배맘이 많았는데 실제 자립으로 이어지기까진 몇 년이 걸릴 터였다. 이들이 자립하게 되면 그때 선택지는 3개로 늘어나겠지. 부모와 살거나, 시설에 들어가거나, 자립하거나.  (그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고 지금은 자립한 당사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뭔가 다른 삶을 사는 사례가 이렇게 없다고요?”     


‘어린이의 엄마’였던 난, 우리 아들이 성인이 되면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조건 잘 살고 있겠지~라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잘 산다는 게 시설 안에서 잘 산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뉴스에 나오는 시설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시설에 가면 막 매 맞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뒷마당에 묻힌다는 이미지가 각인돼 있었다. 

(물론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들을 시설에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그 이유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만약 아들 삶의 마지막이 어차피 시설이라면 나는 아들을 양육할 때 ‘시설 생활에 적합한 발달장애인’으로 키워야 하는 거야? 

슬기로운 시설 생활’을 위한 IEP(개별화교육 회의)를 하고, ‘슬기로운 시설 생활’을 위한 치료실 뱅뱅이를 돌리고? 

아~ 진짜 우울해! 게다가 완전 구려!      


시설이거나 부모와 살거나. 두 개 선택지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요즘은 당연하게 쓰이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이 등장한 게 고작 십 수년 전이라고 한다. 

그 전엔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무력한 존재인 발달장애인이 자립이라니. 꿈도 못 꿀 일이다.        


정책적인 부분도 한 몫을 했다. 그나마 요즘엔 자립지원을 위한 여러 정책이 아~주 조금씩 발걸음을 떼고 있지만 과거만 해도 복지예산은 그냥 시설유지에 몰빵됐다.  


그래서 부모가 열심히 뒷바라지하다가 힘에 부치는 날이 오면 시설에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죽음을 대비하는 부모와 남겨져 살아야 하는 자식 모두를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물론 과거에도 시설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있었다. 

하지만 어쩔 땐 그게 더 문제가 되기도 했다. 사후 대비가 안 되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예고 없는 죽음이 찾아오면 비장애인 형제자매가 대신 보호자 노릇을 해야 했다. 부모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비장애 형제자매도 결혼과 직장 등 많은 것을 포기했다.      


혹은 부모 사후 비장애 형제자매에 의해 시설에 보내졌다. 비장애 형제자매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기에.

비장애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엔 친척집을 떠돌기도 했다. 처음엔 불쌍한 마음에 거뒀던 친척도 오래 가지 않아 당사자를 시설에 보냈다.


이래도 시설, 저래도 시설. 발달장애인의 말로는 늘 시설이었다. 

아, 일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또 다른 일부는 부모 사후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다 노숙자가 됐다.

(메이저 언론을 통해 실태가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도 여전히 정신병원 장기입원자와 노숙자의 상당수가 발달장애인이다)   

   

아무튼 그리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이런 현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없었다. 시설에 가거나 부모와 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성인 발달장애인.


아들도 자립이 가능할지 몰라     


물론 한 명도 없는 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특히 인지 발달이 좋은 발달장애인은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어쨌든 혼자 살아갈 수 있었고 일부는 결혼도 했다.


나도 한 명 만났다. 자립해 살고 있는 당사자. 

기관 자문 자리에서 만났는데 그는 친구 세 명과 함께 집을 얻어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사례는 특별케이스에 가까웠다.      


경증의 지적장애(자폐 성향 없는) 당사자들이 모였다는 점, 당사자 모두가 고기능이라 일반 직장에 취업해 다니고 있다는 점, 부모 경제력이 좋아 (아무리 N분의 1을 했다지만) 서울 한 복판에 방 4개짜리 거주지를 마련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사례를 전체로 일반화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한편에선 또 많았다. 자립해 살고 있는 성인기 당사자. 

이들은 부모와 함께 살던 재가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 운동의 ‘탈시설’ 바람을 타고 자립을 결정한, 시설에서 살다 나온 이들이었다.

      

오~ 좋아. 아예 다른 길이 없는 게 아니었네. 

이들 사례를 통해 제 3의 길에 대해 알아보자.   

   

기존에 나는 기능이 좋으면 자립해 살고 기능이 낮으면 시설에 가는 것이라는 막연한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시설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살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한텐 아직 먼 얘기인데. 

그건 모르겠고, 어찌됐든 아들 기능은 무조건 높이고 봐야지. 그래야 사람 구실하며 살겠지. 

아들이 생후 13개월일 때부터 치료실에 다니고 다닌 이유다. 

기능이 높아야 사람 구실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 구실도 못한다고 '과거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취재를 시작하자 현실에서 자립해 산다는 건 예상과 달랐다. 

할 줄 아는 게 많이 없어도, 기능이 낮아도 자립을 했던 것이다. 

기능이 낮아 돌봄 시간이 많이 필요하면 그에 맞춰 지원인력이 24시간 당사자를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자립지원이 이뤄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이런 사례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부분도 뒤에서 자세히 다룬다)      


허허. 이럴 수가. 이런 시스템이면 아들도 자립해서 살 수 있겠네? 

희망이 한 줄기 생겼다.      


그러는 한편 놀랐다. 

현실의 자립에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건 기능의 높고 낮음보단 사회성 영역, 심리적 영역일지 모른다는 ‘색다른 발견’을 하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지점이다.      


기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자립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데 영향을 미치는가. 

사회성 영역, 심리적 영역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실사례를 통해 문제와 해답에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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