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도] 싸우면서 큰다고? 싸우기라도 했으면!
발달장애인의 갈등 해결 능력이 부족한 이유
자. 취재를 시작하니 힘이 불끈 난다. 한 번 가 보자. GO!
시설을 운영 중인 한 복지재단의 사회복지사와 만났다.
그가 자신이 아는 '안좋은(실패한) 사례'에 대해 말을 꺼냈다.
“이형식씨(가명)라고 있어요. 시설에 있다가 시범 케이스로 먼저 자립을 시작한 분이거든요. 경증의 발달장애가 있지만 인지 기능은 정말 좋아요. 몸이 불편해서 남성 활동지원사의 지원을 받아 생활하고 있어요. 이분 같은 경우는 워낙 인지가 좋기 때문에 걱정을 안 했어요. 활동지원사의 도움까지 받고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었던 거죠”
그의 말이 이어졌다.
“시설에서 나갔다 해서 완전히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정기적으로 형식씨와 상담을 해요. 그런데 형식씨 자립생활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돈이 없는 거예요. 자립해서 살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생활비도 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교통비도 필요하고”
“그런데 돈이 없어요. 인지 기능이 좋기 때문에 직장도 좋아요. 월급도 많이 받아요(그때 얼마인지 들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그 당시 ‘장애인 일자리’ 평균에 비해 많이 받는다며 내가 환호했던 기억이 있다). 월급을 받으면 그 돈으로 한 달을 사용해야 하는데 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진 돈을 몽땅 다 써버리는 거예요”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오~ 발달장애인 자립에 있어선 경제교육이 정말 중요하구나’라고 생각했다.
“경제교육! 음. 엄마들이 학령기부터 이 부분을 철저히 교육해야겠어요”
그런데 이후에 이어진 말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아니요. 이분은 인지 기능이 좋다고 했잖아요. 경제관념도 잘 서 있고 돈 관리도 잘하던 분이에요. 그랬던 분이 돈을 다 어디에 썼냐면요. 성매매를 한 거예요”
형식씨를 지원하는 활동지원사가 어느 날 물었다고 한다.
“형식씨, 여자랑 성관계 해 본 적 있어? 아니 나이가 몇인데…. 어때? 내가 경험하게 해 줄까?”
장애인은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 욕구를 드러내는 것조차 터부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성인기 자녀를 키우던 한 선배맘은 “우리 애들 성욕 줄여주는 약이 있어요. 나중에 동환이 크고 나면 내가 알려줄께요”라고 했을 정도.
장애인의 성 욕구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뻔히 알면서 꺼내기 힘든 말을 꺼내준 활동지원사 제안이 그저 고마웠던 형식씨. 그런데 다음 말이 놀랍다.
“내가 집으로 여자를 불러줄게. 대신 두 명이야. 너는 거실에서 나는 안방에서. 돈은 누가? 돈은 네가”
형식씨가 돈이 없는 이유는 월급을 받으면 초반에 성매매를 위해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란다.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될 최소한의 금액도 남기질 않고 두 사람 몫의 성매매에 월급을 탕진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형식씨 담당 사회복지사는 그를 만날 때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설득했다 한다.
“형식씨. 정말 왜 그래요. 다시 시설로 돌아오고 싶어서 그래요?”
이미 ‘자유의 맛’을 알아버린 몸.
형식씨는 다시 시설로 돌아갈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다고.
“그러면 그러질 말아야죠. 돈을 그렇게 써버리면 어떻게 살아요!”
그때마다 형식씨는 자기도 미치겠다고 했단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왜 그래요!”.
거절할 수가 없다고 했단다.
거절하면 활동지원사에게 미움받을까 봐 거절할 수가 없다고.
이 사례에서 주목할 건 성매매나 경제교육이 아니다.
핵심은 ‘미움 받을까 봐’이다.
형식씨는 ‘거절’을 한 뒤 활동지원사와 갈등 상황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기 싫은 일, 해선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계속했다.
생계에 문제가 생길 지경에 이르러도 그만둘 수 없었다.
형식씨는 활동지원사와의 갈등을 해결할 ‘용기’가 없었다.
사기를 당하는 이유
비슷한 맥락을 보이는 다른 사례를 한 번 더 알아 보자.
이번엔 사기 피해다.
발달장애인이 사기 등의 피해를 입었을 때 법적 지원과 자문을 돕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의 김성연 국장에게 성인 발달장애인의 사기 범죄 연루에 관해 문의한 적 있다.
김 국장은 현황을 전하면서 발달장애인 사기 피해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한 번 사기 피해를 당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비슷한 일을 또 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 번 혼쭐이 나면 그다음부턴 조심할 법도 한데 금방 또 까먹는다고.
기억력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다. 핵심은 관계(친밀함)에 있었다.
발달장애인은 학교와 가정에서 “어디 가서 도장 찍거나 사인하지 말고 돈도 빌려주면 안 된다”는 교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받는다.
사람의 의도까지 고려하지 않는 그 특성 때문에 오히려 사람을 믿지말라는 교육을 받는, 웃을 수 없는 현실.
이런 교육은 효과가 있기도 하고 효과가 없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한 두 번 얼굴 본 적 있던 청년을 만나 “누구씨, 제가 지갑을 놓고 왔어요. 집에 가서 곧바로 돈 보낼게요. 지금 20만원만 빌려줘요”라고 하면 어떨까.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안 돼요”라고 소리 높여 외칠 것이다.
그렇게 교육 받았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기관에서 철저히 교육받았다.
사람들에게 함부로 돈 빌려주지 말라고.
그런데 보자.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직장에서 함께 근무 중인 직장 동료다. 매일 얼굴 보는 친밀한 사이.
또는 청년이 다니는 직장에 단기 아르바이트 하러 온 또래 청년이거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기에 밥도 같이 먹고 커피도 같이 마신다.
드물긴 하지만 어쩔 땐 퇴근 후에 뭐 하냐며 동료들끼리 같이 영화도 보러 가자고 한다.
늘 나를 거부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만난, 몇 안 되는 ‘나를 존재 자체로 받아주는 것 같은’ 사람이다.
이때 상대에게 느끼는 당사자의 내적 친밀감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 어느 날 상대가 아주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얘길 꺼낸다.
갑자기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병원비가 없다고.
다음 달 월급 받으면 갚을 테니까 150만원만 빌려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교육받은 대로 “안돼”라고 하고 싶지만 거절하면 애써 연결된 친밀한 관계가 끊길 것 같은 두려움에 거절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김 국장에 따르면 발달장애인이 사기 범죄에 걸려드는 대부분의 경우가 이런 식이란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사기를 당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친절함을 베풀어준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다는 것.
핸드폰 교체하러 갔을 때 친절하게 인사하고 설명해 준 휴대폰 판매점 사장님,
아르바이트 하러 와서 친구들 노는 데 같이 끼워준 또래 청년,
처음 사귀어 본 비장애인 애인,
종종 먹을 것을 챙겨준 이웃집 사람,
교회나 성당에서 만난 선량한 지인이 발달장애인 당사자에게 사기를 친다.
“내가 지금 에어팟을 사야 하는데 카드 한도가 다 됐대. 네가 핸드폰 소액결제로 이 물건 좀 회사로 배달오게 주문해 주면 안 돼? 먼저 주문해 주면 내가 나중에 돈으로 줄게. 핸드폰 소액결재를 엄마가 막아놨다고? 이리 줘봐. 이거 앱에 들어가서 풀 수 있어. 내가 풀어서 주문할게”
“오빠~ 어제 주인집 아줌마가 갑자기 보증금을 올려야 한대. 나 보증금 못 내면 방에서 쫓겨나는데 어쩌지? 나 이제 어디에서 살아? 300만원이란 돈을 어디에서 구해? 흑흑흑”
“누구씨, 부모님이 남겨주신 돈 우리가 맡아서 관리해줄게. 누구씨 장애인이라고 사기 치고 돈 빼가려는 사람 정말 많을 거야. 그럴 때마다 내가 옆에서 일일이 다 막아줄 수 없잖아. 차라리 내가 관리할테니 누구씨는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써. 그게 낫지 않겠어? 나 믿잖아. 나만큼 누구씨 생각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어”
그렇게 사기를 당한다.
거절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거절하고 나면 발생할 갈등 상황에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YES”라고 답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미움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움받으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아는 것이다.
사실 비장애인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거절 잘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하지만 평소엔 거절에 어려움을 느끼던 비장애인도 자신의 삶이 휘청거릴 정도의 선택 앞에선 '용기'를 내 거절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많은 수의 발달장애인은 그렇지 않다.
왜 유독 발달장애인에겐 이런 일이 더 자주 발생할까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 일단 (지금 얘기하려는 주제와 관련지어)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갈등 해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갈등 해결 능력’을 습득하지 못한 채 어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자립해 사는 발달장애인은 기능이 낮아도 자립을 했다.
하지만 갈등 해결 능력이 없으면 자립생활 자체에 빨간불이 켜졌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은 ‘나 혼자 산다’가 아닌 ‘타인의 지원을 받아 산다’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어울려 사는 능력이 갖춰져야 했다.
타인과 어울려 산다는 건 ‘타인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게 아니었다.
타인에게 “NO”라고 외칠 수도 있어야 하고,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능히 직면해 풀어갈 용기도 있어야 했다.
그런 게 타인과 '진짜' 어울려 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발달장애인이 갈등 해결 능력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독려하고 있다.
주변 어른들이 앞장서서 어릴 때부터 아무런 갈등 상황에 노출되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다.
아들과 다른 딸의 학령기
비장애인 딸은 아들의 쌍둥이 누나다.
딸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즐거웠고, 심지어 그 어떤 드라마보다 재밌었다.
딸의 세계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확 넓어졌다.
1학년 때 딸은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친구 2명과 친해지고 싶어 했다. 둘은 이미 단짝. 같은 어린이집 출신이라 둘만의 세계가 공고했다. 파고들 틈이 없었는데도 딸은 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느 날 둘이 딸에게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신데렐라 놀이를 하자고 했단다.
“우리랑 놀고 싶으면 네가 오늘은 우리 가방을 들고 다녀.”
딸이 신데렐라가 되어 두 언니의 수발을 잘 들면 같이 놀아주겠다고 한 것이다.
딸은 그날 친구들의 가방을 들고 뒤를 따라다녔다.
2학년이 되면서 딸의 눈이 뜨였다.
하루는 “엄마,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둘한테) 호구 잡혔던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딸은 단짝을 만들었다.
아마 1학년 때 두 친구를 보며 단짝의 장점을 알게 된 것 같다.
단짝이 된 친구와 잘 지낸다 싶더니 딸이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다.
현재 단짝보다 더 마음이 맞는 새로운 친구가 나타난 것이다.
딸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새 친구와 놀자니 단짝이 질투하고 단짝이랑만 놀자니 새 친구가 아쉬운 날이 이어진 것이다.
“괴로워~”를 외치던 2학년이 지나고 3학년이 됐다.
딸은 이제 단짝이 아닌 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 사람은 그렇게 과거의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법이지.
그런데 이게 웬일. 3명이다.
학령기 여자친구들 사이에서 절대로 금기시되는 바로 그 홀수 무리!
세 명은 남은 한 명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고 둘씩 돌아가며 남은 한 명을 험담하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6학년이 됐다.
그동안 쌓인 경험이 빛을 발했던지 딸은 안정적인 4명 무리의 일원이 됐다. 할렐루야!
게다가 4명 중 1명은 전교 학생회장이다. 학년 최고의 ‘인싸’가 포함된 무리에 들어가면서 딸도 자연스럽게 반에서 인싸가 됐다. 딸은 최고로 신나는 한 해를 보내고 중학생이 됐다.
딸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내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됐는지 알 수 있었다.
딸이 단짝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할 땐 중학교 2학년 때 단짝이었던 혜영이가 떠올랐다.
3명 무리에서 남은 1명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땐 7명이 무리 지어 다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가장 안정적인 한 해를 보냈던 딸의 6학년 생활을 지켜보면서는 비슷한 한 해를 보냈던 나의 중학교 3학년 시절이 소환됐다.
나도 그랬다. 나도 딸과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즐거웠고 힘들었으며 찬란하고 괴로웠던 학창 시절의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능숙한 사회성 기술을 지닌)를 있게 했다.
학령기는 단지 한글과 숫자, 국어와 수학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성 기술을 익히는 훈련장 같은 곳이었다.
그것을 딸을 보며 알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아들이 측은해 견딜 수 없었다.
딸이 겪고, 내가 겪고, 남편이 겪은 모든 과정을 아들은 하나도 겪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딸과 다른 아들의 학령기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게 친구 관계였다.
(아마 모든 발달장애인의 부모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아들에겐 공부보다 친구가 100만배 더 중요했다.
수능을 잘 쳐서 SKY, 서상한, 중경외시에 입학하는 삶은 아들과 무관했다.
물론 아들이 어릴 땐, 내가 아들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절엔,
아들을 지적장애인 출신 최초의 서울대 졸업자로 만들고 말겠다(엄마의 희생과 노력으로)는 허황된 꿈을 꾸었지만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아들아, 그저 학교 가면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거라.
그러면 더는 바랄 게 없겠다.
아들아, 제발…. 응?
학교에서 (사고쳤다는) 전화가 안 오면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고 생각했다.
하교 시 교사가 “오늘 동환이 잘 보냈어요”라고 하면 정말 잘 보낸 줄 알았다.
그렇게 안심하곤 혼자 기뻐했다.
그런데 정작 아들은 학교에서 잘 보내고 있지 않았다.
친구하고 싸우지 않아서 잘 보낸 게 아니라
친구하고 싸울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에 잘 보내지 못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는 의미가, 알고보니 친구들과 갈등이 일어나지 않게 ‘잘 보호했다(다른 의미론 고립시켰다)’는 뜻이었는데, 아들이 어릴 때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들 옆에 실무사나 공익형이 찰싹 붙어 친구들과의 갈등이 일어날 상황이 발생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을 때도 나는 “호호호. 아들이 특별 케어를 받는구나”라며 좋아했다.
발달장애인이 왜 갈등 해결 능력이 부족하냐고?
그럴 수밖에. 뭘 경험해 봤어야 알지.
갈등을 경험해야 갈등을 풀어갈 방법을 배울 텐데, 갈등조차 일어나지 못하게 주변(엄마인 나부터!)에서 철저히 막고 있는데 무슨 갈등 해결 능력을 습득하겠는가.
사회성 영역이다.
사회성 영역은 글로 배우고, 머리로 익혀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무조건 직접 부딪혀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책으로 연애의 기술을 익힌다고 실제 연애를 잘하진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딸이 1학년 때 ‘호구’로부터 시작해 또래와의 갈등 상황에 계속 노출되면서 스스로 깨닫고 성장해 6학년 땐 ‘인싸’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아들에게도 이런 일 저런 일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했다.
“학교에서 잘 보냈어요”라는 의미가
친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격리)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부딪혀 쿵쾅대면서 싸우기도 하고, 갈등 상황을 온전히 겪고, 그러면서 그 갈등을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통해 풀어가는 법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는 의미여야 했다.
친구로서 인정조차 않는다는 결과
2020년 11월26일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인 세이브더칠드런이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와 함께 ‘2020 한국 아동의 삶의 질’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심포지엄에선 ‘장애가 있는 아동의 삶의 질’ 연구도 함께 했는데 그 중 의미 있는 항목 몇 개를 발췌해 본다.
일단 숫자가 나오면 지루하다고 그냥 넘기기도 하는데, 이왕 여기까지 읽은 거 꿋꿋하게 마저 정독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연구에서 ‘친구가 충분히 많다’(100점 만점) 항목에 비장애 아동은 47.6%, 장애 아동은 16%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도와줄 친구가 있다’(100점 만점)에선 비장애 아동이 44.7%, 장애 아동은 15.2%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장애 아동은 친구도 없고 도와줄 친구는 더더욱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주목할 건 이어지는 결과들이다.
장애 학생은 상대적으로 비장애 학생에 비해 학교 폭력에 노출되는 빈도가 낮았다.
‘학교폭력 경험’(100점 만점)과 관련, ‘어떤 아이로부터 맞은 적이 있다’는 항목엔 비장애 아동의 83.2%, 장애 아동의 69.4%가 그렇다고 답했다.
‘나를 따돌렸다’는 항목엔 비장애 아동의 91.6%, 장애 아동의 76.6%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
학교 환경에 대한 주관적 평가 영역(60점 만점)에서 ‘우리 반 친구들은 자주 다투지 않는다’는 항목에 비장애 아동은 11%만이 그렇다고 답했는데, 장애 아동은 39.5%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 연구 결과에서 어떤 흐름이 눈에 보이는가.
내 눈엔 통합교육 환경에서 장애 아동이 놓여있는 교실 안에서의 고립이 눈에 보였다.
분명 보호받고는 있었다.
비장애 아동에 비해 학교폭력과 따돌림에 노출되는 비율이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애 아동은 비장애 아동보다 거의 4배나 높게 ‘우리 반 친구들은 자주 다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반길 일이 아니다.
툭하면 싸우고 삐지고 돌아섰다 다시 화해하고 친해지면서 인간관계의 기본 틀을 익혀가는 게 학창 시절에 해야 할 마땅한 일인데, 장애 아동은 그 마땅할 일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 친구들이, 친구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보호하거나 배제해야 할 '장애인'으로 대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방향으로 교육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수학교로 오면 상황이 달라질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특수학교에선 종종 경증 장애인이 통합교육에서의 비장애 아동 역할을, 중증 장애인이 통합교육에서의 발달장애인 역할을 맡곤 한다.
교육권과 학습권을 이유로 한 차별과 고립의 방정식은 특수학교 현장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다.
‘돌봄’보다 ‘교육’에 확실한 방점이 찍히는 중등 이후부턴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시스템)이기도 하고.
이래도 고립, 저래도 고립.
이로 인해 나머지 교실 구성원이 얻는 ‘평화’.
이 방향은 맞는 것일까.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은 것일까.
모두 이 방향에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발달장애인이 고립되지 않으면서 어울려 살 수 있는 방법을 위해,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 현장에서 각개전투로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 거대한 시스템은 대체 어떻게 해야 바꿀수 있는 걸까.
‘배워본 적 없는’ 성인 발달장애인의 갈등 해결 능력은 비장애인 유아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다.
서툴다. 사람 대하는 법이 서툴기 그지 없다.
이렇게 성장한 발달장애인은 향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힌다.
가끔은 그 문제가 삶을 뒤흔들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