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도] 발달장애인은 왜 '애정'을 갈구하나요?
침묵한 채 떠나버렸거든요. 사람들이.
성인 발달장애인의 많은 수가 갈등 상황에 취약하다는 건 앞서 말했다.
학령기부터 이어진 구조적(시스템) 문제, 주변 비장애인들의 인식 문제 등 원인을 파고들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어야 하니(영화 ‘물랑루즈’에서도 말했다. “Show must go on”이라고) 일단 지금은 현상(결과)만 다루기로 한다.
거절하지 못했던 발달장애인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번엔 발달장애인을 상대로 거절하지 못하는 비장애인에 대해 얘기해 볼 차례.
어쩌면 우울할 수도 있고 외면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직면해서 바라봐주길 바란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어두운 현실은 외면하고 밝고 좋은 것에만 반응할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발달장애인에게 거절해도 되나요?
한 사회적 기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발달장애인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는 모범기업으로 잘 알려진 곳인데 그곳에서 일하는 비장애인 근로자들과 편하게 얘기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전 질의를 통해 발달장애인 근로자들과 일하면서 갖게 된 궁금함이나 애로사항이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했는데 비장애인 근로자들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로 보였다.
업무적인 부분에서의 고충과 관계적인 부분에서의 어려움이다.
업무적인 부분에서의 어려움은 발달장애의 장애 특성을 고려한 세심한 외부 지원(업무 쪼개기, 매뉴얼화, 시각자료 제공, 근로지원인 파견, 전문가 연계 등)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관계적인 부분에서의 어려움이다.
발달장애인의 '서툰 사회성 기술'은 직장 생활에서도 여러 문제에 부딪혔다.
이날 비장애인 근로자들은 “발달장애인에게 거절 의사를 확실하게 밝혀도 되느냐”고 물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 있다 보면 종종 부담스러운 상황이 발생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선을 긋고 거절하면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장애인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죄책감.
그렇다고 “발달장애가 있으니 전부 다 이해하고 넘어가자” 하면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얘길 들으며 나는 “제발, 확실하게 거절하라”고 말했다.
사실 너무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성인 발달장애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살아가는 비장애인들(주로 사회복지사)에게 참 많이도 들었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발달장애인에게 단호하게 거절해도 되냐고.
거절해도 된다. 아니 거절해야 한다. 제발 그래야 한다.
장애, 비장애를 떠나 생각해 보자.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가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동료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기 시작한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길 하지만 듣질 않는다.
이럴 때 보통 어떻게 하는가?
이럴 때 우리는 “상대에게 이래도 되나”라며 고민하거나 거절한 후 죄책감이 시달리지 않는다.
그 대상이 발달장애인이어도 다를 건 없다.
장애가 있다고 머뭇거리면 오히려 그때야말로 당사자를 ‘불쌍한 장애인’으로 타자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진정 나와 같은 직장 동료로 인정하고 있다면 거절하는 데 있어 ‘장애인’이라는 대상화의 상자를 덮어씌울 이유가 없다.
지금 나열한 ‘거절해야 할 이유’는 다분히 인권적인 접근 방식이다.
이것만으로도 거절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마음 한편에 불편한 감이 남아있다면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봐도 좋을 듯 하다.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삶을 이해하고 당사자를 위하는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는 것이다.
갈등을 풀기보단 차단
먼저 홍길동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 본다.
길동씨는 발달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관계에서 거절당하는 경험을 해봤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사회로부터 툭하면 거부당하는 경험은 수시로 했을 것이다.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간접적 거부의 경험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하지만 친밀함을 느끼는 가까운 관계(비장애인)에서 확실하게 거절당한 경험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일단 친밀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관계가 폭넓게 구축돼있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인 발달장애인이 가장 친한 친구로 ‘엄마’를 꼽았다는 사실은 발달장애인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세상과 단절돼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고 기능 발달도 좋아서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형성돼 있어도 역시 거절당한 경험은 생각보다 저조할 것이다.
“장애인에겐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거절하면 나쁜 사람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거절하는 것보다 차라리 도망가는 편을 택하곤 한다.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갈등 상황이 발생했다.
이 경우 많은 비장애인은 갈등을 풀기보다 발달장애인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방식을 선택하곤 한다.
그냥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죄책감이 덜하고 상대에게도 상처를 덜 준다고 생각한다.
종종 그런 질문을 받는다. “발달장애인은 왜 그렇게 애정을 갈구하나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나는 길동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겉마음과 속마음이 같은 길동씨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길동씨 입장에선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솔직한 삶을 살고 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선 지켜야 할 선이 있고 규범이 있지만 길동씨는 “안 돼”라는 말 외엔 “그럼 어떻게?”에 대해선 배워본 적 없다.
아니, 배우긴 했으나 말로 배웠을 뿐 실제 관계에서 경험해 본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어느새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없다.
길동씨 입장에선 이유도 모른 채 남겨졌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뭐. 사람들의 ‘거부’는 살면서 늘 경험해왔던 일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지만 그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
순식간에 대상을 잃어버린 마음엔 텅 비어버린 공간이 남았다.
구멍 난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대상이 그 자리를 메꾸는 것뿐.
이유도 모른 채 혼자 남겨진 이는 마음의 허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나랑 친하게 지내자” “나를 사랑해 줘. 나를 예뻐해 줘”.
대상을 찾아 나선다.
가슴의 구멍을 메워줄 새로운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렇게 발달장애인은 애정을 갈구하냐고.
마치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참 쉽게도 묻는다.
거절당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않을까.
일방적인 거부로 관계가 단절된 경험만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인간사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갈등 후 관계가 더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지 못한 채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냥 사라져버려서 그런 게 아닐까.
침묵한 채 떠나버린 사람들로 인해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뻥~하고 뚫려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에게 약간의 친절만 베풀어도 거절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에게 약간의 호의만 베풀어도 그 상대에게 집착하는 게 아닐까.
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발달장애는 특권이 아니다
발달장애는 ‘특권’이 아니다.
발달장애가 있다고 세상만사에 ‘장애인 프리패쓰권’을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당사자는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게 된다.
게다가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말 안 해도 모두가 알겠지만 ‘피해를 주는 발달장애인’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회 전반의 단단한 의지마저 읽힌다.
이런 상황에서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주변 비장애인이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당사자가 사회성 기술을 익히고 배울 수 있도록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에 적합한 사회성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힘껏 지원하는 것이다.
여러 규범과 규칙을 지키는 것부터 시작.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된다.
마음의 문제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거절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경험을 해야 하고,
거절당해도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경험을 해야 한다.
상처 받고 상처 입히며 갈등 상황에 놓이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갈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과 태도가 필요한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발달장애는 특권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냉정한 사회 안에서가 아니라
발달장애인에 대한 '옹호 집단'이 있는 관계 속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번은 성인 발달장애인인 하성재(가명)씨를 이틀 연속으로 만날 일이 있었다.
얼굴은 처음 봤는데 SNS로 소통하던 터라 내적 친밀감은 높았던 사이.
이틀째 일정이 끝나자 성재씨는 다가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얼굴 봤으니 밥 먹어야죠. 뭐 먹을래요?”
다짜고짜 뭐 먹으러 갈 거냐는 말에 처음엔 당황했다.
집에 가서 애들 밥 차려야 한다며 주절주절 변명처럼 상황을 설명하려다
아니, 이번 기회에 단호하게 거절당하는 경험을 성재씨가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거절당했다 해도 우리 관계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상대와 약속을 잡을 땐 ‘나 중심’이 아닌 상대를 배려한 대화법이 필요하다는 것도 성재씨는 누적된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할 테니까.
변명하듯 늘어놓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상대인 나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들이밀기는 부담이 된다고.
처음엔 뻘쭘해하던 성재씨였지만(자신이 제안했으니 당연히 내가 응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곧 상황을 받아들이고 잘 헤어졌다.
성재씨 입장에선 거절당했지만 우리 사이는 끊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성재씨가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런 경험을 할 기회가 많아지길 바랄 뿐이다.
이 세상 모든 발달장애인의 갈등 어린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