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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연 Sep 01. 2023

[장애도] 고립되면 죽는다!

사람은 고독해서 죽는 게 아니라 고립돼서 죽는다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 신현기 교수님으로부터 특수청소업체 ‘하드웍스’ 대표 김완이 저술한 <죽은 자의 집청소>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고독사한 이들의 현장을 청소하는 특수청소원 이야기다.    

  

손이 가지 않았다.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한다니….

우왕~. 생각만으로도 슬프고 우울해!      


언제부턴가 다큐멘터리를 안 보기 시작한 것과 비슷한 마음에서다.  

지금 현실의 내 삶이 다큐인데 왜 또 다른 현실을 봐야 한단 말인가.

굳이 콘텐츠를 통해서까지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어느 날 ‘심심해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곧, 자세를 바로 세우며 끝까지 완독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진실’이 책 안에 담겨 있었다.      


“혼자 죽은 채 방치되는 사건이 늘어나 일찍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고독사 선진국 일본. 그 나라의 행정가들은 ‘고독’이라는 감정 판단이 들어간 어휘인 ‘고독사’ 대신 ‘고립사’라는 표현을 공식 용어로 쓴다. 죽은 이가 처한 ‘고립’이라는 사회적 상황에 더 주목한 것이다 ('죽은 자의 집청소' 중 발췌)”.     


김완 작가는 말했다.

사람은 고독해서 죽는 게 아니라 고립돼서 죽는다고.

그렇기에 ‘고독사’라는 말 대신 ‘고립사’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고.


그랬다. 사람은 고독해선 죽진 않는다.

하지만 고립되면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른다.     


아들은 나에 비해 훨씬 고립될 여지가 많았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고새 좀 컸다고 벌써부터 ‘고립의 경험’을 곳곳에서 하는 중이다.      


고립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먼 훗날 ‘나는 잘 죽고 아들은 잘 살릴 수 있는’ 자립 성공의 가장 중요한 핵심 열쇠다.       


엄마가 쓰러졌어요     


2020년, 마음이 요동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수역에서 거리 생활중이던 성인 발달장애인을 사회복지사가 발견해 안전한 곳으로 인계한 사건.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언론 기사를 토대로 재구성해 본 당사자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엄마와 둘이 살던 그. 엄마가 쓰러졌다.

그는 ‘죽음’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지 않는 엄마 몸에 파리가 붙고 벌레가 꼬이자 엄마를 지킬 생각을 한다.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불 주변을 청테이프로 붙였다.

이러면 벌레가 엄마에게 가지 않겠지.      


엄마를 지키려 애썼지만 배고픔은 견딜 수 없었다.

버티고 버티다 버티지 못한 어느 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거리 생활을 시작했다.      


사회복지사가 그를 발견하면서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의무교육인 학교조차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큰일(정확한 사유는 모른다)을 겪고 난 후부터 엄마가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장애 등록도 되어있지 않았다.

치료실이나 복지관을 다닌 적도 없다.

그저 엄마와 단둘이 집 안에서 숨어 살 듯 지냈다.


하지만 엄마가 그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쓴 메모를 보고서 나는 엄마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사회복지사에게 내민 메모엔 “엄마가 쓰러졌어요”라고 적혀있었는데 또박또박 한 글자씩 얼마나 예쁘고 바르게 적은 글씨였던지 나는 메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발달장애인이 초등학교 때 큰일(?)을 겪어 학교를 그만뒀다면 한글을 미처 다 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위해 집에서 직접 한글을 가르쳤겠지.  

또박또박 예쁘고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보살핌이 있었을까.      


모자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설득하는 사람도 없었고

성인이 된 그의 존재를 알아채는 사람도 없었다.      


고독해서 죽는 게 아니라 고립돼서 죽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옆집 문만 두드렸어도     


생각해 본다. 만약 이들 모자가 고립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다못해 엄마가 쓰러지자마자 밖으로 나가 도움을 청하기라도 했다면.

이들은 뉴스에 나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엄마가 쓰러졌어요”라고 쓴 메모를 들고 나가

매일 가던 편의점, 한 달에 한 번씩 가던 미용실, 주치의처럼 이용하던 내과에 가서 그 종이쪽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밀기만 했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면 집 앞에 서서 종이쪽지를 지나다니는 누군가에게 내밀기만 했어도.       


하지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종이쪽지를 내미는 행위 자체도 타인과 교류하는 일.

사회성 발달이 더딘 발달장애인이 오랜 시간 고립된 삶을 살아왔다면 ‘도움을 요청한다’는 작은 행위조차 어렵고 힘들게 느꼈을 것이다.


경험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 본 경험이 없어서.      


이 사건 이후 나는 아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사회성 발달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치료실에서 열심히 리본 묶는 법을 배워 운동화 끈 묶을 줄 아는 성인으로 자라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보단 운동화 끈이 풀렸을 때 묶는 걸 도와달라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는 게 더 좋다.  

나는 아들을 그럴 수 있는 성인으로 키워야겠다.


나는 잘 죽고 아들은 잘 살려면, 아들이 고립되지 않는 성인으로 자라야 한다.

타인과 어울려 산다는 것의 여러 의미를 아는 성인으로 자라야 한다.  

내겐 이것만큼 중요한 화두가 없다.      


어떤 만남     


어떤 만남은 한순간 스쳐 지났어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경기도 한 지역에서 성인 발달장애인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는 엄마도 그랬다.

그녀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읽어준, 아들에게 받았다는 메시지 내용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있다.      


그녀의 아들은 기능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매일 아침이면 규칙적으로 출근하는 직장이 있었고, 직장에 다니니 월급을 받았고, 월급을 받아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취미로 문화생활도 즐겼다.      


일상생활 기능도 좋아서 엄마가 집을 비워도 혼자 생활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당장 자립해도 크게 걱정할 일 없어 보이는 그런 당사자였다.      


그녀가 말했다.

가족 부고였던가 (이 부분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갑작스러운 일로 2박3일 간 지방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고 한다.

혼자 남게 된 아들. 엄마는 걱정했지만 아들은 생각보다 훨씬 잘 지냈다.       


“아들이 문자를 보냈는데 이렇게 쓰여 있더라고요. 엄마.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출근도 잘했고, 연극도 보러 갔다 왔고, 집안청소도 다 해 놨고, 밥도 잘 먹고 있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 말을 이어가려던 그녀가 울컥.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음 말을 이어갔다.      


“엄마,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

엄마가 없으니 말할 사람이 없어서 너무 외로워요”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이제 그녀 아들은 엄마가 아니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겼을까.     


고립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도 그녀의 아들도.

나도 내 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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