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게 갑자기 뭔 일이래
바야흐로 평화로운 목요일 오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지막한 출근 후 점심을 즐기고 본격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던 그 순간,
"응? 이게 뭐야. 슬랙 뭔가 바뀌었네."
라는 CTO님의 한마디가 들려옵니다. '음? 아직 내 슬랙은 그대론데...'라고 생각하던 중, 강제로 슬랙이 재시작되며 업데이트가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슬랙은 어떠한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기에도 모자랄 만큼 짧은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재부팅된 슬랙을 보는 순간 제 미간은 찡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응? 왜? 아니 그것보다 이 어정쩡한 보라색은 뭐람? 아니, 저 로고는 또 뭐야? 회사 내 디자이너들은 당황하고, 회사의 공기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만 적지 않은 투덜거림이 이어졌지요.
사실 뭐 사람들 다 알만큼 유명한 브랜드의 리브랜딩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막대한 돈과 시간, 갈려나가는 디자이너와 기획자들의 영혼, 출시 직후부터 무수히 받게 될 대중들의 비난과 멸시 등을 동반하지요. 그런 점에서 슬랙의 리브랜딩은 물어뜯기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기도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애드온을 위한 개방성 등의 이유로 슬랙은 스타트업을 위한 채팅 툴로써 아이콘 격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보통 스타트업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변화에 민감하고 비판에 인색하지 않은 젊은 층들입니다. (게다가 그중 적지 않은 수는 4년간의 대학생활로 인해 거친 입과 날카로운 안목을 탑재한 디자이너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랙은 리브랜딩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더욱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준비했을지도 모릅니다.
자, 그래서 살펴보았습니다. 슬랙은 어떠한 이유들로 리디자인을 하게 되었고,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기에 이런 못생긴.. 아.. 아니 개성 있는 로고로 탈바꿈하게 되었을까요? 음, 쉽사리 찾아지지 않아 몇 분간 더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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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역시 무리인가 데헷!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인지 어디서부터 장점을 찾아봐야 하나 감이 오질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슬랙에서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공개한 것인지 공식 성명을 찾아보도록 하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리디자인하게 된 이유를 슬랙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존에 사용되던 슬랙의 로고는 11가지의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도는 18도 좌측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색을 제외한 바탕화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각도가 정확하게 맞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말 별로였지요. 그게 참 골칫거리였는데... 쉽게 말해 그냥 끔찍했습니다. (It pained us … Simply awful.)"
생각보다 강한 어조입니다. 바로 전날까지 아무 문제없이 쓰던 자기들 로고를 Simply awful이라고까지 표현하다니. 로고를 변경하게 된 이유도 하나씩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로고에 사용되는 색상의 수가 적을수록 여러 가지 배경색과 미디어에 적용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고, 로고가 18도로 기울었든지 18.3도로 기울었든지 대다수의 대중들은 어차피 구별하기 쉽지 않겠지만 눈치 빠른 몇몇 디자이너들은 (특히나 슬랙 로고 제작자들은) 잘 못 인쇄된 로고라도 보는 날에는 안절부절 매우 심기가 불편한 하루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인터넷을 조금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세계 각지에서 슬랙 유저들의 조롱과 논리적인 비판 등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사람들 보는 눈은 역시나 다 비슷한지 제 생각과도 겹치는 것들이 많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제가 주관적으로 느꼈던 점들과 인터넷 상에서 많이 언급되는 부분들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우선 업데이트가 진행되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슬랙 어플에서 주로 사용되던 메인 색상입니다. 슬랙은 데스크톱 앱과 모바일 앱 모두 연한 보라색을 메인 색상으로 사용합니다. 가지 색상이라고 슬랙에서는 주장하는데 eggplant도 아니고 영국에서 자주 사용되는 auberigne이라는 이름을 가진 색상입니다. 사실 가지보다는 냉장고에 사흘쯤 넣어두어서 탁해진 팥죽색에 가까운데... 암튼 뭐 가지라고 칩시다. 근데 이 색상이 꽤 채도가 진한 보라색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슬랙 상에서의 한글 폰트 weight가 영어에 비해 미묘하게 얇아서일까요. 흰색으로 표현되는 텍스트들과의 대비를 더 강하게 주기 위해서 보라색을 진하게 한건 알겠는데 왠지 모르게 가독성이 더 안 좋습니다?? 그래도 참고 몇 시간 사용했지만 역시 비비드 한 보라색은 계속 쳐다보고 있을 놈이 못됩니다. 어서 빨리 연한 클래식 테마로 돌아가야지... 했더니 웬걸. 몇 시간 동안 강한 보라색에 눈뽕 당한 후 재회한 연보라는 유난히도 거무틔틔해 보입니다. "ㄷ ㅏ 생각해서 만든 건데 이유가 있겠지"하며 몇 번 재시도했으나 결국엔 다시 연보라색으로 회귀한 상태입니다. 장점을 하나 두자면 뭐...... 새로운 색상이 가지에 더 가깝긴 하네요. 색상이야 개인의 기호가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이 색상의 문제는 다른 곳에 존재합니다.
리브랜딩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로고겠지요. 사실 애플리케이션의 보라색 패널과 씨름하다 보니 정작 로고의 변화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로고 리디자인이 아니고 단순히 색상 정도의 변화만 있는 마이너 업데이트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내 정신 좀 봐 어떻게 아이콘이 변하는데도 모르고 있었지 정말 하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놀랍게도 또! 그 보라색에 있었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텀블러의 공동 창업자이자 iOS 개발자인 Marco Arment가 슬랙 리디자인 발표 당일에 올린 트윗입니다. Marco가 언급한 대로 슬랙은 "가장 눈에 띄던 iOS 아이콘을 아무것도 아닌 밋밋한 새 디자인 때문에 버려버렸"습니다. 저는 데스크톱 app만큼이나 모바일 슬랙도 자주 쓰는데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공교롭게도 제 아이폰 배경화면도 검은 계열이라 위의 이미지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콘이 되어버렸습니다. 배경이 흰 계열이어도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애당초 가지 톤의 보라색은 아무리 채도를 높여봤자 다른 색상들에 비하면 명도가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슬랙의 오랜 팬들이 격분한 이유는 또 따로 있습니다. 슬랙은 아직 해시태그라는 개념이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기 전에 # 심벌을 자신들의 로고로 선점했습니다. 선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슬랙은 대성공을 거두며 인지도를 높여갔는데 덕분에 아직까지도 해시태그를 이용한 로고! 하면 슬랙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최근 트렌드에 이렇게나 부합하는 로고를 얻고서, 심지어 경영진에 제시된 디자인 초안에 #를 살린 디자인이 여전히 있었음에도 이렇게 간단하게 팽- 해버린 모습에 해외 팬들이 유난히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로고는 아무리 봐도 쉽사리 # 로 보이지는 않은가 봅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요즘 로고들 다 너무 똑같은 거 아니야?
실제로 요즘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발언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업종을 가리지 않고 "로고 심벌은 단순하게, 폰트는 산세리프"의 공식이 마치 바이블처럼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딩에 큰돈을 들이지 못하는 스타트업들이야 그렇다 쳐도 유명 대기업들 조차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개성 있는 로고들을 마구마구 바꾸기 시작했죠.
개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것 같던 하이패션 업계조차 전부 산세리프로 바뀌어가고 있으니 말 다했습니다. 산세리프 폰트는 사실 브랜드 요소로 보았을 때 좋은 점이 많습니다. 인쇄 상이던 화면상이던 세리프에 비해 더 일정한 굵기를 지니고 있어서 가독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슬랙의 이전 로고는 어땠을까요?
약간의 곡선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산세리프 폰트라고 봐도 무방한 폰트에서 굵고 기하학적인 직각을 뽐내는 산세리프로 변경되었습니다. 둥글둥글했던 기존의 해시태그 모양 심벌과 곡선의 산세리프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고, 지금의 로고도 균형 상으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 한번 생각되는 점은 "굳이 그 밸런스를 깰 만큼의 가치가 있었을까"입니다. 슬랙은 현재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툴을 벗어나 스타트업을 위한 토탈 솔루션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대중적이고 범용성 있는 폰트를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찌 되었던 슬랙은 애플리케이션입니다. App으로써 사용될 때 그 가치가 더 빛을 발하고 업데이트로 인해 현재 UX에 큰 결함이 생기거나 또는 슬랙을 위협할만한 다크호스가 갑툭튀 하지 않는 한 현재의 왕좌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슬랙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번에 더 안타까웠던 점은 공교롭게도 제가 자주 사용하는 Adobe의 Behance도 비슷한 시기에 웹사이트 리디자인을 시행했는데 그 결과물이 좋아서 슬랙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슬랙 측에서는 자신들이 많은 인력과 비용을 소비하고도 이런 반응은 받는 것이 물론 실망스럽겠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그들의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하렵니다. 부디 저 같은 범인에게도 그 큰 그림의 메시지가 곧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