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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Nov 20. 2017

리뷰를 쓸 수 없는 게임.

"The Beginner's Guide",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The Beginner's Guide"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게임이 있다. 2013년도에 출시되어 큰 호응을 얻고, 수많은 게임 관련 업계에서 상을 받았던 "The Stanley Parable"의 작가 Davey Wreden이 제작했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명시돼 있지만, 필자는이 게임의 리뷰를 쓸 생각이 없고,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필자의 의견과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며, 게임의 줄거리와 그에 대해 내가 느꼈던 것들에 대해 기록하려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본인이 최근 글을 쓸 용기가 없어진 이유를 조금은 노출시키고자 한다.

 

게임은 원작자 Davey가 본인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그는 Cod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개발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말하며, 이 게임을 만든 목적이 개발을 중단하고 홀연히 사라진 Coda에게 다시 개발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서라고 밝힌다. 그렇게 시작한 게임은 Davey의 내레이션과 함께 Coda가 이전에 만들었던 게임들을 시간 순으로 안내한다. (게임이 타 개발자가 제작한 게임을 모아서 만들었다는 설정이다)총 17개 (인트로 포함 18개) 스테이지로 구성된 이 게임은 Davey가 맵마다 본인이 느낀 점들, 자신에게 게임을 통해 투영된 Coda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와 함께 우리에게 제공된다. 그리고 이는 DaveyCoda의 게임 내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스타일이나 콘텐츠를 발견해 추론한 내용들을 뛰어넘는다. DaveyCoda가 누구인지를 그가 제작한 게임을 통해 '완벽히'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신념은 플레이어였던 필자가 유추한 정보가 아닌, Davey 장본인이 내레이션을 통해 명시되는 사항이다.

Davey는 결론이나 의미가 있어야지만 만족을 하기에 Coda의 게임 내에 가로등을 배치한다.

하지만 이는 보기 좋게, 온전히, 처참하게 틀렸음이 밝혀진다. DaveyCoda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게임에서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Davey는 본인을 위해 게임을 변형시킨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아주 큰 부분까지, 게임은 Davey의 손을 탄다. 60초면 해결할 수 있는 미로를 그는 "이게 딱히 뭘 의미하지 않는 것 같고, 시간문제도 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게"라며 플레이어를 순간이동시킨다던지, 한 시간가량 그대로 있어야만 열리는 문을 열어버린다던지, 달팽이 기어가듯이 움직여야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플레이어의 이동속도를 원래대로 돌려버린다던지 말이다. 그는 게임 그대로를 진행하기보다는 결론이 존재하는, 하나의 해결점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도달하기를 원한다. 도달점에서 그 나름의 해석을 공유하며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은 비참한 결말로 향한다. 우리는 게임의 끝에 근접하면서, DaveyCoda에 대해 내린 결론들이 전부 Coda에 대한 것보다, Davey에 더 많은 것들을 암시함을 깨닫는다. 그는 결론이나 의미가 있어야지만 만족을 하기에 Coda의 게임 내에 가로등을 배치한다. 존재하지 않던 하나의 '테마'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는 Coda의 게임들을 타인들에게 보여주며 Coda의 심리 상태를 전달함으로써 본인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여기서 불편한 사실은 Davey의 해석들이 전부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틀렸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콘텐츠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점은 자신의 욕구를 위해 Coda를 고통받고 있는, 정신적 결함이 있는 게임 개발자라고 포장했으며, 포장하기 위해 게임을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오락을 위해 생산된 것들은 대부분 소비자의 소비 행위가 생산 가치를 완성시킨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산자가 '이건 오락을 위해 만든 거야'하고 창작한 것들은 실제로 오락 행위의 맥락에서 소모되지 않는 한 존재 가치가 옅다는 뜻이다. 게임은 분명 오락성을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Beginner's Guide"는 소비자보다는 창작자의 창작 행위에 큰 무게감을 둔다. DaveyCoda의 관계는 명백하게 (욕망 표출의 형태가 왜곡된) 소비자와 창작자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게임 내의 스토리는 그러한 소비 행위로 인해 상처받아 창작을 중단한 개발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이 게임의 리뷰를 작성할 수 없게 느껴진다. 필자가 이 게임에 대한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Davey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이 글 자체가 Davey가 게임 내에 심어둔 가로등과 같은 불청객이 되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본인은 굉장히 위험한 선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런 소비자의 '해석'행위 자체는 사회 내에서 굉장히 팽배하다. 이는 단순히 오락 매체에 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 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뇌 구조의 작동 방식 상 무의식 중에서 일어난다. 좌뇌의 기능 구조는 지속적으로 비판적 판단과 분석 과정을 통해 본인을 타인들과 비교한다. 이를 통해 경제적, 학업적, 솔직함, 관대함, 그 외 모든 특징들을 등급화 시켜 각자 어디 즈음에 위치하는지를 파악한다. (Jill B. Taylor, 2006)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기호(Sign)'의 형성 과정을 옅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소쉬르의 기호학 개념-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에 대한 정의와 '랑그(Langue)'와'파롤(Parole)' - 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표'는 '기호'의 실질적 존재로써,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당신이 현재 읽고 있는 화면 위의 글씨는 여러 빛이 혼합된 시각적 신호로써 '기표'의 역할을 띤다. '기의'는 정신적인 반응이다. '기표'가 감각기관을 자극하면 두뇌는 해당되는 정보에 대해 연상되는 개념들을 불러일으킨다. 예시를 들어보면, '나무'라는 '기표'를 통해 '갈색 기둥에 여러 초록 조각들이 달린 것'이라는'기의'가 생성된다. 소쉬르는'기표'와 '기의'가 함께 된 형태를 '기호'라고 불렀다. 이런 ‘기호’도 언어의 맥락에서 생산/소비되기 때문에 '랑그'와 '파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랑그'는 간단히 말하면 동일한 언어 내에서 이용되는 어법이다. '파롤'은 '랑그'를 기반으로 사용과 동시에 발생하는 개개인의 응용이다. 예를 들면 한국어의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 독립어라는 문장 성분이 '랑그' 이며 그를 이용해 만든 문장, 예컨대 "나는 정말 배가 고프다" 등이 '파롤'이다. 소쉬르는 연구에서 '랑그'에 집중했다. 개개인과의 격차가 심한 '파롤'은 연구하기가 어렵기에 '랑그' 내에서'기표'와 '기의'라는 구분할 수 있는 개념들로 '기호'(언어)를 설명하려 한 것이다. (Stuart Hall, 1997)

 

DaveyCoda의 관계 속에서 이를 응용해 보자. Coda의 게임들은 하나의'기호'다. 그 기호에는 '기표'가 존재하는데 이는 게임 내의 시청각적 신호(맵의 모양, 내레이션, 효과음 등)가 된다. 이제 '기의'를 Davey가 형성시키면 되는데 여기서 어려움을 겪는다.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납득할만한 '기의'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CodaDavey 둘은 게임을 플레이하고 제작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동일한 '랑그'를 공유하지만 '파롤'의 발화가 극명하게 갈린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기의'가 존재해야 하는가? '파롤'의 발화가 명백한 의사소통의 형태를 띨 필요가 있는가? (이와 비슷한 이유로 '랑그'와 '파롤'의 분리가 주관적이기에 소쉬르의 기호학 개념은 비판받는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오락이나 문화를 위해 소비할 때 '기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소비한다. 필자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가 직접 작성한 로미오와 쥴리엣이 몇 억 마리의 원숭이가 동시에 타자기를 무작위로 치다 확률론적 가능성으로 탄생한 동일한 글자 배열의 종이 묶음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인지한다. 하나 본질적인 문제는 이 외에서 발생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가 직접 작성한 글이 몇 억 마리의 원숭이가 동시에 타자기를 무작위로 치다가 탄생한 동일한 글자 배열의 종이 묶음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한다.


당신들은 글에서 "어떤 것을 읽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를테면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가 “난 보랏빛이 좋아”라고 말하는 구절은 죽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라고 어린 시절 국어 시간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게 소설을 읽는다, 작가의 의도를 읽는다 등의 맥락으로 우리들은 배운다. 문제는 이 '읽는다'라는 '기표'는 너무나도 다양한 '기의'가 내재돼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무엇을 읽었다, 라는 문장에서 이 단어는 '작가의 기의를 파악했다'와 거리가 멀다.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우리는 작가의 ‘기의’를 파악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현대 작가와 같은 경우 실제로 물어보아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책만 마주한 우리에게는 해당 문장의 당위성을 판단할 척도가 없다. 둘째로는 작가와 당신들은 완전히 다른 언어 (파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의 '나무' 예시를 다시 보자. 필자가 말하는'나무'의 모양새가 당신이 생각하는 '나무'의 모양새와 일치한다고 확신 지어 말할 수 있는가? 필자의 나무는 단풍나무일 수도, 소나무일 수도 있다. 당신의 나무는 어떠한가? 만약에 같은 단풍나무를 떠올리더라도, 온전히 같은 나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런 발화하고자 하는 화자의 입장으로 인해서 수많은 '파롤'이 나오는 언어의 구조상 우리가 '작가의 기의를 파악했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설에서 어떤 것을 읽는다'라는 문장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해당 문장은 결국 ‘소설에서 난 이런 것을 느꼈다’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해설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포한다. 이는 해당 문장의 본 의미이며, ‘기의’이다. 일반적으로 당신들이 이해하는 ‘소설에서 이런 것을 읽었다’라는 ‘기표’가 가지는‘기의’와 거리감이 상당한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리낌 없이 많은 것들을 ‘읽었다’, 라고 투박하게 표현한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의식 중에서 타자의 ‘기표’ 속에 수많은 가로등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의문점을 가지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리뷰가 아니다. 감상문이다. 아니, 일기장이다. 한낱 낙서다. "The Beginner’s Guide"의 후반부 스테이지에서, Coda가 직접 Davey에게 게임을 통해 말을 건다.



If there was an answer, a meaning, would it make you any happier?
해답이나 의미가 존재했다면, 너가 좀 더 행복했을까?
The fact that you think I am frustrated or broken says more about you than about me.
네가 나에게 좌절했다 거나 망가졌다고 하는 말들은 나보다 너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암시해.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 필자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리뷰랍시고 지껄인 기표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리뷰가 아니라 개인적 감상문이라 하연들, 필자가 원작자의 의도를 읽었다고 말한 글들에서 당신들은 나를 볼 것이고, 나를 보더라도 당신들은 나에 대해서 ‘읽었다’고 착각하며 당신들을 볼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글에 의미가 있는가? 필자는 뭘 하면 되는 거지? 본인은 왜 지금도 이렇게 자판을 누르고 있는 걸까?


이미 이 글 또한 당신들의 생각과 "The Beginner’s Guide"를 플레이하려는 소비자의 마음속의 가로등이 되었을 생각에 두렵다.


이젠 그만 쓰려한다.


Don't act like you know me 'cause you recognize me.
나를 알아본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
You sell my record, not me.
너는 내 음반을 사지, 나를 사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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