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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가 Apr 07. 2020

평평한 길

모두가 오르내릴 수 있는 도시

네덜란드에서 의외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턱"이다  가장 찾기 어려운 건 단연 맛있는 음식이고. 집 안에도 문턱이나 방 턱이 없고, 건물과 길 사이에도 단차나 계단이 없다. 길가의 경계석은 색만 다르거나 아주 미세하게 높이차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 계획된 도시를 가든, 인도와 횡단보도가 만나는 곳은 여지없이 경사가 져있다. 버스에도 계단이 없고, 지하철 칸 사이도 매끈하다. (약간의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단적으로 말하자면,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내려서 목적지까지, 그곳이 어디든,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턱을 넘어야 하는 일 없이 도착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길은 놀라울 만큼 평평하다. 이건 물론 산도 언덕도 좀처럼 보기 힘든, 해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양질의 자전거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자전거 이용인구가 월등히 많은 것도 바로 이 완만한 땅 덕분이다. 하지만 기차역과 지하철역의 플랫폼에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 모든 시내버스를 저상버스로 운영하는 것, 심지어 그 안에 휠체어와 유아차를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두는 것은 결코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도시 공부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는 데에 정말 큰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평평한 길의 발견이었다. 휠체어는 물론이고, 유아차나 보행 장치도, 무거운 카트나 캐리어도 훨씬 더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 한 번은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 밖을 내다보는데 플랫폼에 큰 철제 리프트가 보였던 적이 있다. 내릴 때 보니 휠체어 이용자의 편리하고 빠른 하차를 위해 역무원이 해당 승객이 출발할 때 탑승했던 문 앞에서 리프트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던 거였다.

한국에서는 명절 때마다 시외버스와 고속버스에 대한 휠체어 접근권 시위가 반복된다. 나아진 게 없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버스의 저상버스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버스들에 있는 "두-세 칸의 계단"은 누군가에게 한 없이 높은 장벽이다. 지하철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다. 2001년 리프트 추락사고 이후 역 내 리프트 이용 시의 안전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대부분의 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스무 개가량의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휠체어 접근이 어렵고, 설계상 리프트 설치만 가능해 위험한 곳들도 있다. 도로와 같이 도시 내 기반 시설의 접근권을 확장하는 논의에서 흔히 반론으로 제기되는 주장은 정책의 수혜대상이 적어 효용이 낮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시급한 과제들 조차도 예산 문제로 지연이 되고 있기 때문에 "소수"를 위한 정책을 추진할 여력이 '지금은', '아직은' 없다는 변명으로 2020년도 지나가고 있다.


반 고흐 미술관을 비롯 대부분의 네덜란드 미술관에는 휠체어 이용객을 포함해 청각, 시각 등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방문객에게 어떤 도움과 장비를 제공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물론 네덜란드에도 여전히 휠체어로 접근이 불가능한 공간들이 있다. 일례로, 유명 관광지가 밀집되어있는 암스테르담 구시가지는 늘 붐비는 좁은 도보와 울퉁불퉁한 길바닥 등으로 휠체어 접근이 어렵다. 오래된 건물에 들어선 시내 호텔이라면 대부분 엘리베이터가 없고, 성인 여성 한 명이 지나가기에도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 경우 휠체어 접근 가능 여부를 숙박 예매 사이트 등에 미리 공시해둔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대중교통 관련 시설과 학교를 포함한 각 급 학교, 미술관, 공연장, 영화관 등의 대중 시설은 휠체어 접근이 수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평평한 길"을 포함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공간이나 시설을 설계할 때 예상 이용객을 쉽게 단정 짓지 않는 것이다. 도시를 적대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걷기가 힘든 사람이라면,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혹은 어떤 곳에만 갈 것이다'라는 오만과 무책임함이다.


길 한가운데 설치되어있는 도보를 이용하면 로테르담 중앙역에서 시내까지 약 300m가 되는 거리를 횡단보도나, 턱, 경계석, 계단 없이 "평평하게" 걸을 수 있다.

서울 시내 육교는 점점 줄어들어 2018년 기준 155개가 남아 있다.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설치되었지만, 그보다 앞서 자동차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설치된 지하보도도 아직 81개가 남아있는데, 이처럼 수직 이동이 필요한 보행 시설 총 236개 중 오직 32곳에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다. 한편, 네덜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현재 거주하고 있는) 로테르담은 2014년 완성된 중앙역 마스터플랜에서 기차역을 오가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도보를 확장, 자전거 도로만 남겨두고 모든 차량을 지하차도로 통행하도록 설계했다.

몇 해 전 서울시 보행친화정책의 일환으로 개장한 서울로7017은 고속 성장의 상징이자 차가 다니던 고가를 보행자를 위한, 식물이 있는 산책로로 탈바꿈시킨 공간이다. 지역 내 봉제 산업 종사자 및 주민들과의 갈등이 있었고, 그 외에도 설계 및 시행 과정에서 마냥 긍정적인 평가만 할 수는 없는 사업이지만 적어도 휠체어를 포함해 장애인들도 접근하기 쉽도록 설계를 한 것은 유의미한 진보다. 식재를 위해 설치해둔 콘크리트 화분이 너무 크고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어 실질적인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화분 수도 원래 설계안의 3/4으로 줄였다. 단번에 잘하기란 원래 쉽지 않은 일이고,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지만 서울에도 이렇게 조금씩 평평한 길이 늘어나고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서울처럼 밀도가 높고,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불편과 소외를 경험하는 도시일수록 그 빛을 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 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나아가 경제적으로도 평평한 길이 많아지기를, 그래서 개인의 노력으로 문턱을 넘는 일이 언젠가는 구시대의 것처럼 여겨지기를 바란다. 

다음 글은 평평한 길 끝에서 만나는 또 다른 길, 횡단보도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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