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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드림 Jun 09. 2024

어쩐지 여유롭다 했다

길을 잃고 오히려 여유를 찾았다

모처럼 대체교사 업무 요청을 받았다. 요청받은 곳은 초행길에다가 버스로 1시간 정도 가는 길이라 평소보다 일찍 나와 버스를 탔다. 혹시나 잠들어 버릴까봐 내리기 20분 전에 알람도 맞춰놨다. 긴장 되어서 그런지 잠도 깊이 빠져들지 못했고, 목적지를 알리는 방송이 들리자 내릴 준비를 했다. 


30분이나 여유롭게 도착하다니! 로드뷰로 미리 봤을 앞에 공장만 있고 다른 없었는데 주변에 상가도 많아서 그동안 개발이 이루어졌나보다 싶었다. 뙤약볕에도 자전거를 타며 즐겁게 노는 아이들, 낯설지만 정다운 학교 교정을 거닐면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용모를 정돈하고 기관에 들어가기 전에 늘 하는 기도를 했다. 15분 전에 도착해서 미리 인사를 드리고, 전달사항을 받으러 갔는데 이게 웬걸. 


"안녕하세요. 오늘 000 선생님 대체 교사로 오게 된 000입니다."

"네? 저희 학교에는 그런 분 안 계시는데...?"


아... 어쩐지 여유롭다 했다. 한 글자 차이로 다른 학교로 와버린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런 마음도 사치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죄송합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다시 길을 찾으니 15분 정도는 더 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버스가 금방 와서 바로 올라탔고, 기관에 전화 드려 양해를 구했지만 첫 만남부터 지각쟁이로 낙인 찍힐까봐 너무 두렵고 초조했다. 바로 달려갈 준비를 하느라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 눅진하게 녹아내리는 땀을 어쩌지도 못한 채 좌불안석이 되어버린 나. 길은 굽이굽이 들어갔고, 시간은 영원처럼 아득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있는 것이라고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멍하니 버스 앞만 바라볼 뿐. 




무채색 건물들이 사라지고, 노랑과 초록이 하나둘씩 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정말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듯한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버스는 수풀로 우거진 나무터널 속으로 향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꽉 찬 자연을 보니 풀 죽어 가는 마음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클로드 모네의 개양귀비꽃, 들판을 연상하게 하는 풍경은 오로지 저마다의 최선으로 피어난 평화로움만이 가득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초조해해도 어차피 일어난 일이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앞으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좋은 기분만 남기고 마음을 갈아끼우자.'


손바닥 같은 나뭇잎은 나의 초조함과 불안함을 다독여주었고, 들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미소 짓는 여유를 주었다. 개울물은 최선을 다해 새로운 마음가짐을 심어주었다. 고이지 말고 흐르게 하라고 말하면서.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쓰는 글. 이따금 마음이 슬픈 잿빛으로 번지면 다시 그 풍경을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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