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2018
유전. 애니가 스티브 앞에서 스케치북을 불태우는 장면.
다락방에서 엘렌의 시체를 본 이상 스티브에게 이 모든 상황은 터무니없다. 애니는 절박하고 스티브는 견딜 수 없다. 애니는 스케치북을 불태워야 하고 스티브는 엘렌의 간청을 따를 수 없다. 애니는 스케치북에 불이 붙기 시작한 순간 자신의 옷자락에 타오르던 불의 기세를 떠올린다.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스티브가 망설이는 사이 애니가 스케치북을 뺏어 벽난로로 던진다. 스케치북이 타오르는 순간 스티브가 화염에 휩싸인다. 스케치북이 타오르는 것, 애니가 무언가에 시너를 뿌리고 불태우는 것, 스티브가 불길에 사라지는 것. 세 사건은 명쾌한 인과 없이 하나의 순간 속으로 수렴해버린다.
영화는 유령이다. 보는 행위(spect-)는 유령(spectre)의 어원이다. 영사기의 원리는 유령을 보는 것이었다. 영사기가 비추는 곳에 실제 있지는 않지만 실제처럼 재현된다는 상상은 환영, 달리 말해 유령 같은 것이다. 그래도 영화가 도대체 어떻게 유령일 수 있냐고 따진다면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으로 활동사진이 유령으로 거듭나는 방식을 우아하게 설명할 수 있다. 혹은 롤랑 바르트. "사진은 기이한 매체/영매(medium)이자 환영의 새로운 형태다. 지각의 차원에서는 거짓되지만 시간의 차원에서는 진실되기 때문이다."
영매가 된다는 것은 영화가 된다는 것이다. [유전]에서 애니가 영화라는 가설을 세운다면 우리는 [유전]을 영화에 대한 영화로 읽을 수 있다. 애니는 찰리를 잃은 상실감에 영매(medium)가 된다. 혹은 그녀 자체로 영화라는 매체(medium)가 된다. 촛불을 켜면 영매가 되어 유령이 보인다는 기본 설정으로 영사기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애니가 스케치북을 불태우는 순간 스티브가 타오른다는, 애니의 환영은 기이하다. 하지만 애니가 영화라는 상상 속에서는 이 장면이 새롭지 않다. [시네마 천국]에서 영사 중인 영화 속 등장인물이 총에 맞는 순간, 클로즈업된 인물의 얼굴이 갑자기 사라진다. 영사기에 불이 붙으면서 필름이 불타버린 것이다. 필름이 불에 타면 영사된 인물이 불타 사라진다. 스케치북이 불에 타면 스티브가 불에 탄다.
애니와 피터의 추격전에서 애니가 괴이할 정도로 빠르게 머리를 두드리고 자신의 목을 찌르는 모습은 영화의 잔상효과를 닮았다. 눈을 잃은 채 우는 피터 얼굴의 연속 그림은 더 명시적인 잔상이다. 카메라가 뒤집힌 채 시작해 180도를 수직 회전하는 하얀 복도 씬은 거꾸로 상이 맺히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과정처럼 희한하다. 영화에 대한 상상 속에서 시체를 맴도는 파리와 날갯짓 소리는 오래된 필름의 노이즈와 영사기 소리가 된다. 끔찍한 정신질환이 유전되고 시체를 파헤쳐 경외하듯 모시되 참수해버린다는 설정은 영화사에 빈번했던 물결들처럼 느껴진다. 최후에 애니의 어머니 엘렌과 노인 둘이 발가벗은 채 흑백영화처럼 등장하는 섬뜩함은 영화의 오랜 과거로 돌아가는 듯하다. 찰리는 몇 번씩 엘렌을 그리워했다.
애니는 영화일까. 확실한 건 영화는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유령이 맞다. 극장 안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만큼만 지속되는 거짓 속에서 영화는 유령이 된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는 해리성 인격장애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믿을 수 있다는 조현병이라는 거짓이다. 유령인 관객이 영화라는 유령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