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혀님 Jun 24. 2018

영화의 격세유전

캣 피플, 1942

캣 피플. 일리나가 앨리스의 밤길을 좇는 장면.


올리버와 앨리스의 관계가 은근해진다. 멋지다는 칭찬에 앨리스는 "그래서 내가 위험한 법이지. 나는 신여성이거든"이라고 답한다. 겁 없는 표정이다. 곧 홀로 귀가하는 앨리스. 어두운 돌담길에 가끔 가로등이 켜져 있다. 숨어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올리버의 부인 일리나는 앨리스를 뒤따르기로 한다. 앨리스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일리나의 걸음이 뒤섞인다. 자객 같은 일리나의 모습이 어둠에서 그림자로, 또 그림자에서 어둠으로 스친다. 클로즈업된 다리들의 걸음이 빨라진다. 일순간 일리나의 구두 소리가 사라진다. 가로등 아래에 와서야 뒤돌아보는 앨리스. 구두 소리에 맹수의 소리가 뒤섞이는 순간 칼날이 꽂히듯 등장하는 버스가 앨리스를 구출한다.


Cat People


이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처음 등장한 점프 스케어(jump scare)로 꼽힌다. 갑작스러운 전환이나 등장을 통해 관객을 놀라게 하는 점프 스케어는 공포영화의 흔한 연출 방식이 됐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축적되던 불안이 극대화되던 순간 갑자기 정거하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을 뒤덮는 버스는 공들인 스펙터클 장치였다. 최초로 정교하게 설계된 점프 스케어는 B급 영화의 가장 격식 있는 장면에 기발함을 더해준다.


버스가 등장하기 직전 들리는 흑표범의 포효는 일리나가 실제로 흑표범으로 변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노골적인 암시다. 영화 마지막에 일리나의 변신이 현현하기 전까지는 징후만 가득할 뿐이다. 조상의 악병을 이어받아 흑표범으로 변신한다는 것이 마을의 저주인지 일리나의 정신질환인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다만 세르비아 식당에서 일리나를 자매로 부르는 여성의 존재는 흑표범의 정체가 어느 쪽이든 유전의 가능성을 남긴다.


유전은 명시적이다. 영화는 영화 속 정신과 의사가 쓴 가상의 책 '격세유전의 해부학'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안개가 계곡에 머무르기를 계속하자, 오랜 죄악 역시 낮은 곳, 즉 세상 의식의 우울함에 매달리기를 계속한다." 캣 피플의 유전적 특질은 안개인 동시에 오랜 죄악이다. 일리나에게 격세유전된 변신의 능력이면서도 불안과 열망을 자아내는 우울한 성정이다. 영화 중반부에는 정신과 마음의 차이에 대해 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최후에 정신과 마음은 모두 유전되는 어떤 것으로 남는다.


영화 [유전]을 보면서 이 영화 [캣 피플]이 떠올랐다. 점프 스케어가 수십 년 뒤 공포영화의 공식으로 자리 잡듯 정신과 마음이 묘하게 격세유전된다는 [캣 피플]의 설정이 영화 [유전]으로 격세유전된 느낌이었다. 70여 년의 시간이었다. [캣 피플]은 맹수로 변신하는 모습이나 특수효과 없이도 불안을 쌓아가는 재능 있는 영화였다. 그리고 점프 스케어를 발견한 영화였다. 점프 스케어는 이제 공포영화가 남발하는 시시한 수법이 되었다. 다행히 [캣 피플]이 보여준 다른 재능은 영화의 시간에서 다시 격세유전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전의 불타는 필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