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혀님 Jul 31. 2018

불안을 비추어 흩트리는 카메라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1962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클레오가 타로점을 본 뒤 카페를 들르는 장면. 


클레오가 커피를 마신다. 앙헬의 말처럼 커피는 진정제이자 흥분제다. 클레오는 일순간 진정하고 흥분한다. 앙헬이 웨이터에게 수다스럽게 얘기를 이어간다. 곧 프레임이 불균형하게 이등분된다. 클레오가 산만하고 불안하게 커피를 마신다. 동시에 한 남녀가 이별을 맞는다. 자리를 뜨는 남자가 클레오의 프레임을 가로지르듯 스쳐 나간다. 프레임 분할은 끝났다. 하지만 클레오의 자리 뒤에 기이하게 놓인 거울은 다시금 묘하게 장면을 왜곡한다. 마음이 동한 클레오는 부서진 화면을 가로지르듯 카페를 떠난다.


Cléo de 5 à 7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약 오후 5시부터 6시 30분 정도까지에 이르는 클레오의 순간을 다룬다. 상영시간이 90분이니 그녀가 파리 시내에서 겪는 90분의 분초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하지만 아니다. 영화는 짧은 쇼트를 여러 차례 반복해 보여주는가 하면 점프컷을 통해 짧은 순간을 생략하기도 한다. 어떤 순간은 반복되고 어떤 순간은 생략된다. 그 순간들이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클레오의 감정을 시계열처럼 기계적으로 늘어놓지는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누벨바그의 대담함으로 요동치는 이 장면도 그렇다. 카페에 도착한 클레오는 등 뒤편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거울 간의 원근을 이용한 이 쇼트에서 클레오의 얼굴은 착시를 통해 두 모습으로 찢어진다. 검진 결과를 앞두고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곧이어 나오는 프레임 분할 역시 착시다. 언쟁하는 남녀의 모습은 거울에 비친 맞은편의 상황일 뿐이다. 프레임 바깥에서 떠드는 앙헬의 잡담이 거슬리지만 클레오의 온 정신은 거울 속 남녀에게 가 있다. 아녜스 바르다는 복잡한 미장센과 세련된 카메라 워크로 클레오의 불안을 단선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남자가 클레오 앞을 지나고 클레오가 남자처럼 거울로 가득한 이 카페를 떠날 때 삶과 죽음의 뒤틀린 단면을 읽게 된다.


결국 거울은 깨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단편 무성영화에서 고다르가 선글라스를 벗어던지는 행위와도 같다. 박살난 거울을 뒤로하고 도착한 공원에서 클레오는 군인과 만나 비로소 자신의 진짜 이름을 드러낸다. 아른거리던 죽음이 이제 또렷한 형상을 내보이지만 그녀는 결국 삶의 의미를 오롯이 바라본다. 거울을 통해서 혹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생에 충실할 때 떠오르는 사랑의 가능성이 존재 이유다.


암 진단 결과 발표를 앞두고 불안해하던 여가수가 암이 맞다는 판정을 듣는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평안을 완성한다는 내용 자체는 비약에 가깝다. 하지만 시간과 프레임을 다루는 숱한 거짓말 속에서 최후에 정제된 듯한 야외 쇼트의 구성, 관객의 불안을 일으키던 거울의 부재, 부유하던 질문에 급격히 내리는 응답 등은 평안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자기기만 없이도 그녀는 행복할 것이다. 그처럼 기교와 기술은 영화의 본질일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의 격세유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