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집이라는 존재..
본 글은 2019년도 6월경에 작성해두고 실제 발행은 2020년 2월에 발행됐다.
제주에서 육지로 온 지 벌써 꽉 채워 7개월이다.
그동안 링거를 몇 번 맞을 정도로 호되게 아팠고, 평생(?)동거인이 생겼으며 분사 덕택(?)에 팀을 이동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이 일어난 터라 제주와는 완전히 다른 타임라인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우선 출퇴근길이 바뀌었다. 슬슬 걸어가면 10분 거리에 도착하던 출근길이 칼치기와 끼어들기를 몇 차례 겪으며 20분을 냅다 달려 회사에 도착한다. 귀여운 것을 보면 '심쿵'이라는데 매번 나오는 '심욕'상태다.
회사 일이야 어딜 가나 비슷하긴 하지만 최근 몇 년의 근무환경이 훨씬 윤택했던 터라 판교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로도 고되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을 매일 만나다 보니 아무것도 안 해도 소비되는 느낌이랄까.
가령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색하게 만난다던가, 불편한 사람과 양 옆 화장실 칸을 나누게 된다던가 하는 일 말이다. 말하고도 너무 자잘해 민망하지만 사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태, 이게 알게 모르게 쌓여 스트레스가 된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나이 먹어 그런 건지..
제일 달라진 건 특히 해 지는 시간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일이다. 제주 근무지는 사방이 통창이라 안개가 끼는지 바람이 부는지, 비가 오는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곳은 가로나비 100m가 넘는 10층짜리 건물에 몇 백 명이 똑같은 자리에 앉아 근무를 한다. 물론 한쪽은 유리창이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대부분 블라인드를 내린 상태이거나 블라인드가 걷혔어도 맞은편 건물이 가까이 보이는 수준이다. 업무를 쳐내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밖은 어느새 어스름해졌다. 이미 해는 서쪽 저 멀리로 넘어갔고.. 그럴 때마다 매번 아쉽다. 아.. 오늘은 해지는 거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육지로 올라오고 난 뒤 늘 항상 제주에 가고 싶었다. 지금 제주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다급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어떻게든 얼른 제주에 좀 다녀와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는 기분이 계속됐다.
연중 날씨가 가장 좋은 오월과 유월의 제주. 각각 7박씩 있었으니 근로자의 여행으로는 꽤 길게 다녀왔다. 제주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눈에 익은 익숙한 장소들은 그 자리에 있어 더욱 반가웠다. 그런데 제주에 다녀오고 나서 제주에서 보낸 시간을 곰곰이 복기해보니 좀 이상했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소진됐다는 기분도 들었다.
7박에 5번의 숙소 이동, 탑동-중문-우도-성산-구좌.
이게 가당키나 한 일정인가? 제주 살 때 누가 이렇게 일정을 짜 오면 혀를 끌끌 차며 세상 모지리 취급을 하며 '이건 여행이 아니야! 훈련이지!' 라며 면박을 줬을 일을 내가 하고 온 거다.
여행 전 지역을 대충 고르고 에어비앤비에서 숙소를 찾게 됐는데 도착 시간과 이동 동선과 다음 날 일정까지 고려해 알파고 수준으로 경우의 수를 굴려 장소를 고르니 대략 세 곳으로 정할까 싶었다. 그런데 저 아래 클릭하지 않은 노을 맛집의 숙소 뷰에 눈길이 갔다. 클릭하니 따뜻한 노을 뷰가 화면 가득 펼쳐졌고 마음이 홀린 나는 근처 숙소 2박을 깨고 여기서 하루 묵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5개의 숙소를 모두 '예약 확정'까지 받아버리고 말았다.
제주에서 살 때와는 다르게 아주 많은 곳을 빠르게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늘 피곤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하루에 3시간 이상이었다. 막 더워질 때라 주차해둔 차 안은 뜨겁기 그지없었고, 우리는 맥반석의 오징어도 아닌데(맞나?)허벅지를 구워가며 다음 이동 장소를 네비에 찍기 여념이 없었다.
그뿐인가? 수x미식회 출연을 알리는 현수막이 반경 50m 앞에서도 훤히 보이는 맛집을 얼결에 찾아가 1시간 반이나 기다려서 만난 고기국수 한입에 괜히 동거인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여기 가자고 하는 거 왜 안 말렸어?!'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여행객이란 늘 이런 마음이겠지. 시간을 쪼개고 휴가를 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경비를 들여 제주에 온 사람들은 한치의 실패도 용납될 수 없었을 거다. 찾아간 곳마다 인생 맛집이어야 하고 앉는 자리마다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이렇게 고생해서 온 여행이 인스타그램에 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여행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주의 시간이란 이런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됐다.
한적한 바닷가 그늘에 돗자리를 펴 의자를 놓고 앉아 책을 보며 맥주를 마시다가 금방 책을 얼굴에 덮어두고 낮잠을 자는.. 그러다 일어나 출출해지면 간판으로 더듬더듬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돼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무슨 음식이 나올까 설레며 기다리는 재미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에 봐 둔 해넘이 포인트에 차를 세우고 수평선에 닿기 직전까지 용암같이 이글거리는 해를 바다가 꼴깍 삼켜버리는 걸 매번 신기하다고 감탄하는 매직아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밤하늘에 뜬 별처럼 빛나는 바다 위 한치 배들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시간들..
나는 그런 시간들이 좋았다. 그래, 나는 그런 시간들을 좋아했었다.
작년과 달라진 건 제주도에 우리집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늑한 다락방이 있던 빌라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실내만은 광활했던 아파트도 이젠 없다. 그냥 차를 빌려 여러 숙소를 전전하는 천만 여행객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다시 그런 시간들을 갖기 위해서는 다시 '우리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절경도 좋고 멋있는 뷰의 카페도 좋지만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쉬어야지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지만 '내일 느지막이 일어나도 괜찮잖아'라며 다시금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곳, 바로 우리집.
안 되겠다. 제주도에 다시 우리집이 있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