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일 년 동안은 우리집
드디어 제주도 우리집을 구했다.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제주 내려가는 길에 열심히 제주 교차로와 오일장을 뒤졌다. 그중 2개가 마음에 들어 부동산에 연락해 약속 시간을 잡았다.
첫 번째 집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정실마을 근처였는데, 이 동네는 공항에서 연동이라는 초시내권을 살짝만 지나오면 갑자기 벚나무 가로수가 쭉 이어지며 여기저기 귤밭도 나타나는 시내 속 전원 마을이다. 1층으로 된 단독주택은 집 사이즈만 한 마당이 있었는데 관리가 된다고 했다. 막상 가보니 게스트하우스에서 관리하는 펜션형 주택이었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펜션 같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운명의 집은 조천읍 와흘리에 있었다. 제주 시내에서 와흘리로 가는 길은 매우 눈에 익숙했는데 전에 스쿠터로 성산을 넘어갈 때 달리던 중산간동로 길이 었다. 길은 한산하고 주변이 예뻐 스쿠터 타고 시원하게 달리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주택은 메인 도로에서 살짝 비껴 난 아담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골목 앞쪽에는 잘 관리되는 십여채의 타운하우스들이 있었고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단독주택들이 나타났다. 주변 집들은 모두 잘 가꿔진 느낌이었는데 상시 거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집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이 모두 귤 밭이었다. 카카오맵으로 찍어보니 들어온 골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귤밭이었다. 앞쪽에는 건물이 없이 트여있었다. 날이 흐려 한라산은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보일만한 위치였다. 2층 집이었다면 충분히 보였을 텐데 오늘 우리가 볼집은 1층이라 집 안에서 한라산 조망은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들어서면 왼쪽이 안방과 거실, 정면이 주방이었다. 오른쪽에서는 화장실과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건너방 근처에는 다용도실이 하나 붙어 있었다. 작지만 알차게 구성된 느낌. 날이 흐려 빛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정남향 집이었고 남북으로 창이 나 있어 환기에 제격인듯 했다. 실제 열어보니 맞바람이 불어 집안 구석구석 바람이 와 닿았다. 인테리어는 깔끔하고 무난했다. 사이즈는 조금 작아도 있을 것은 모두 있었다. 이 정도 사이즈면 아일랜드 식탁만 있는데 4인용 식탁까지 있었다. 작지만 2인용 소파도 있었다. 풀옵션 합격.
이전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하셨나 물었더니 주로 한달살이 같이 단기로 빌려주었고 매번 관리가 어려워 지난 10월에 연세 매물로 내놨다고 했다. 거실과 주방 모두 잘 꾸며진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커튼만 봐도 그랬다. 속 커튼과 암막커튼까지 구비해두는 곳은 잘 없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커튼을 이중으로 달아둔 것만 봐도 집을 관리한 사람의 애정이 보였다.
거실에 작은 소파도 그랬는데 소파 위에 꽃무늬의 소파 쿠션도 있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쿠션이 있다는 점이 세심하게 느껴졌다. 세심한 포인트는 하나 더 있었는데 소파 앞쪽에 있는 겨울용 카펫이 있다는 점이었다. 카펫은 집을 따뜻하게 하는 실용적인 기능은 없지만 집을 따뜻하게 보이게 하는 감성적 기능이 있다. 밟으면 포근한 기분이 들어서 마치 이 집이 포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안방이 좀 작다는 것과 에어컨이 없는 점이 가장 흠이었다. 거실과 건넌방 모두 에어컨이 있는데 안방에 에어컨이 없다니.. 아무래도 방 사이즈 상 에어컨을 따로 놓기 애매해서 건너뛴 것 같기는 했다. 여름에 덥지 않을까 싶었지만 와흘도 중산간이고 맞바람 불게 창문 좀 열어두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안방에는 침대장 없이 퀸 사이즈의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다. 침구는 뭐 바꿀 테니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작지만 의자 2개를 놓을 수 있는 테라스가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침대 맞은편에 작은 스툴을 놓고 스탠드 조명을 하나 두면 방이 좀 더 따뜻해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도 속 커튼과 암막 커튼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수면에 최적화된 잠을 위한 방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욕실을 지나 반대편에 건넌방이 있었는데 안방보다 조금 크고 한쪽 벽면이 모두 붙박이장이었다. 웬만한 물건들은 다 보관이 가능할 것 같았다. 수납도 합격. 창 너머로는 왼쪽으로 옆집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임대인이 현재 사는 집이 보였다. 창문 앞은 임대인 집에서 2층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 시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넌방에는 세탁실로 가는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보일러와 세탁기가 나타난다. 평소 드럼 세탁기에 불신이 큰 나는 통돌이 세탁기를 보고 기뻤다. 세탁기 왼쪽 옆 벽면으로는 자질구레한 물품을 정리할 수 있는 4단 선반도 있었다. 분리수거함도 따로 있어 다용도실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용도실 합격.
주방 맞은편이 욕실인데 욕실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직접 짠 욕실장도 있었고 해바라기 샤워 헤드도 있었다. 작지만 창도 있어 환기에 아주 좋을 것 같았다. 세면대 물을 틀고 변기 물을 함께 내려봤는데 물줄기가 약해지지 않아 더 좋았다. 환기도 수압도 합격.
집을 한번 본 뒤 임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이 현재 건설업을 하고 있어 직접 집을 지었으며 원래는 시부모님을 모시려고 지은 곳인데 오지 못하게 되셔서 그동안 단기 임대 형태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아내, 남편 모두 시내로 출퇴근 중이라 주말에만 집에 있다고 했다. 이층 집에는 신혼부부가 살고 있고 얼마 전에 재연장을 해서 더 살게 됐다고 들었다.
우리는 실거주 목적은 아니고 세컨드 하우스로 이용할 것이라 말했고 우리가 내려오지 못할 때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임대인은 제주에 집이 있다고 하면 사돈에 팔촌까지 다 놀러 온다고 잘 안다고 말했다. 친근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에 성격이 털털하실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임차인의 체크리스트에는 임대인의 성격까지 포함되니 이 점에서도 합격.
일단은 잘 봤다고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며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차에 타서 동거인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어때?' 하고 물었다. 동거인에게 먼저 말해보라고 했더니 '본 중에 여기가 제일인데? 진짜 집 같은 기분이 들어. 동네도 집 사이즈도, 집주인도 다 맘에 들어.'라고 말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동안 본 집들은 으리으리하게 좋은 집도 많았다. 하지만 이 집은 전에 본 집들과 달리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집도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 건 매한가지인데 왠지 모르게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본 집들은 모델하우스나 펜션 느낌이 났다. 관리가 되지 않은 집들은 춥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 이 집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게다가 주변 귤밭이 있어 더 마음에 들었고 진짜 제주 같은 동네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금액도 합격. 보증금 500만 원에 연세 700만 원. 그동안 보던 집들이 보증금 1,000만 원에 연세 1,000 만원~1,300 만원 수준이었다. 더 낮은 금액대도 있었지만 너무 낡거나 원하는 조건들이 맞지 않았다.
카카오맵을 켜 공항까지의 거리를 보니 16km, 편도 30분 거리였고 이동 동선이 복잡하지 않았다. 주변에 관광지라 할 곳도 없어서 주말마다 차량이 붐비는 도로도 아니었다. 차량이 없는 경우를 고려해 택시와 대중교통 길 찾기도 확인하니 버스로는 한번 갈아타 45분 정도가 소요됐고 택시비는 편도 약 1.6만 원이 예상됐다. 거리도 합격.
천천히 운전해 함덕 해수욕장까지 가보니 15분이 걸렸다. 주말에 집에 있다가 휙 바닷가에 다녀와도 좋을만한 거리였다. 이 정도면 여름에 물장구치고 귀찮게 샤워까지 하지 않고 수건으로 두른 뒤 집에 와서 씻어도 좋을 만한 거리였다. 바닷가와 거리 합격.
원래는 한 집을 더 보기로 했는데 이 곳에 확신이 생겨 취소 전화를 넣었다. 3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개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알려드린 후 1시간 뒤에 다시 집에서 보자고 했다.
1시간 뒤에 그 집에 가니 남자 임대인까지 와 계셨다. 남자 임대인도 친절하고 인상이 좋으셔서 더 마음에 들었다. 계약서를 적으면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주소지를 보시더니 제주 내려오기 전에 이 근처에서 사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그 동네 사는 사람을 만나니 더 반갑다는 덕담도 해주셨다.
본인이 집을 지었으니 이용하면서 고쳐야 하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했다. xx건설 유니폼을 입고 계신 남자 임대인이 무척 든든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을 테니 우리가 집을 비울 때 임대인 분들이 오며 가며 살펴봐 주실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입주일에 뵙겠다고 인사를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약간 흥분된 마음에 산책 좀 하다가 이동할까 싶어 귤밭 주변을 한 바퀴 걷는데 동네 주민분이 지나가셔서 인사를 했다. 따뜻하게 인사를 받아주시고는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동네에 방금 연세 계약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라고 말했더니 '아이고, 잘 오셨네.'라고 환영의 인사말을 건네주셨다. 아직 잔금도 치르지 않은 계약이지만 벌써 이 동네 주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생겼다. 제주도 두 번째 우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