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어른이
귤은 많이 먹었어도 그 귤이 달리기 전 하얗게 피어나는 귤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배가 열리기 전 배꽃이 피고 복숭아가 달리기 전 복사꽃이 피는 게 당연한데 어쩐지 귤꽃은 낯설기만 했다.
제주에 처음 이주를 왔던 2016년 봄. 고사리 장마가 지나가는 즈음에 왔던 터라 찬란한 오월의 제주를 만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일 빠르게 점심을 먹고 긴 산책을 했고 주말에는 산이고 바다고 달려 나가 온몸으로 햇빛과 바람을 맞았었다.
그때는 차를 사기 전이라 조그만 스쿠터를 타고 다녔는데 아침 출근하는 길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고 신나는 것이었다. 이유가 뭘까를 생각하며 조금 더 달리다 보니 도로 주변 아니 이 곳 어디에서도 황홀한 꽃향기가 나는 거다. 차를 세우고 좀 더 킁킁 맡아보니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세상 처음 맡아본 향기였다. 근원이 어딘지 알지 못했지만 세상 좋은 향기를 맡으며 달리니 꼬마 자동차 붕붕이 왜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회사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물으니 웃으며 '귤꽃'향이라고 대답해줬다. 귤꽃? 그동안 늘 향기를 뿜으며 존재해왔을 귤꽃일 텐데 나에게는 너무 생경한 꽃이었다. 이주 전에 제주를 와 본 경험이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총 두 번밖에 되지 않으니 귤꽃이 피는지 지는지 알 수 없을 수밖에.
회사에 오는 길 중간쯤에 도로 양쪽이 모두 귤밭인 곳이 있었는데 딱 그곳을 지날 때 엄청난 꽃내음을 맡을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이유였다.
시간이 흘러 퇴근 시간이 되고 업무를 더 정리하느라 밤이 되어서야 퇴근을 하게 된 나는 살짝 무서움이 들었다. 제주의 밤은 생각보다 어둡고 이렇게 어두울 때 스쿠터를 타고 귀가하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별 일 없겠지 되뇌며 집으로 향하던 나는 아침에 지나쳤던 귤밭을 지나면서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황홀했다. 아침에 맡은 향기에 거의 서너 배는 진한 향기였다. 아니 같은 곳인데 이렇게 진하게 향이 날 수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스쿠터에서 내려 귤밭 돌담 근처를 킁킁 거리며 걸었다. 세상에 어떤 향도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그동안 자연에서 맡아본 향 중에 치자꽃 향이 으뜸이고 라일라 꽃 향이 그다음인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는 귤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 옆에서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이 향기를 간직하고 싶다, 우리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하마터면 가지를 꺾을 뻔했다. 귤꽃이 진 자리마다 귤이 열린다는 팀원의 말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동네 밭에서 서리하는 나쁜 이주민이 될 뻔했다.
지금 제주집을 선택하게 된 이유 중에 3할 정도는 바로 이 귤꽃 때문이다. 제주집은 바로 옆에 귤 농장이 있고 크게 주변을 둘러봐도 다 귤밭에 둘러싸여 있다. 집을 애워싼 귤밭을 보고 '오월의 귤꽃향'을 떠올렸더니 코끝에 아련하게 귤꽃향이 나는 것 같았다.
다른 멤버가 캔슬하는 바람에 이번 제주행은 급하게 진행됐다. 뭐 그래 봤자 전날 비행기표를 끊는 수고면 금방 갈 수 있는 제주집이다. 제주에 도착해 늦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 택시에서 내려 집 앞을 걸으니 온 사방에 귤꽃 향기가 가득하다. 아찔하게 향기에 취한다는 말이 너무 상투적 일지 몰라도 한 밤중에 맡는 귤꽃 향기는 정말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언젠가 귤꽃 향기를 맡는 날이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