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윈도우가 깔리기도 전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딴 컴퓨터 신동
세상에 윈도우가 깔리기도 전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딴 컴퓨터 신동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두부. 학창 시절 꾸준히 컴퓨터를 좋아했던 두부는 자연스럽게 전산을 전공하고 IT업계에 엔지니어로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업계의 실상은 두부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IT업계 하면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회사를 떠올리는데 대부분의 한국 IT기업들은 상당히 보수적이에요. 군대문화 심하고 마초들 많고. 회사 구성원 대부분이 남자들이기 때문에 까라면 까는 거고 잘 못 까면 쌍욕이 그냥 날아오죠.
두부는 처음엔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두부가 맡은 업무는 포털사이트나 게임 서버와 같은 전산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업무 특성상 야간작업이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컴퓨터를 쓰는 낮 시간대에는 전산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어야 하니까 이용자들이 적은 야간 시간대에 서버 점검을 하는 것이다.
“IT 마케팅을 하기 전엔 엔지니어로 근무했었어요. 군대문화 때문에 때려치웠죠. 일만 하면 일은 즐겁게 하겠는데 욕하는 건 못 참겠더라고요. 자리에 앉아서 일하고 있는데 발로 제 의자를 툭툭 차면서 ‘뭐하냐 똑바로 해라’ 이런 것까지 당해봤어요. 선배들의 폭력적인 언행, 잦은 야간 업무를 견디기가 힘들어서 다른 진로를 알아보다가 IT 마케터가 됐어요. 제가 마케팅 전공자는 아니지만 다행히 직무가 적성에도 맞고, 기획하고 정리하는 능력도 있는 덕분인지 벌써 7년 차가 됐네요.”
다시 두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두부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그는 될성부른 부치였다. 두부는 유치원 때부터 보이시한 청남방을 입고 유치원 등원을 하려고 했다. 어린 두부는 여자 구두는 왠지 신기 싫었다.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남자 주인공 네로가 신던 신발이 신고 싶었다. 어머니께서 두부와 여동생의 구두를 한 쌍씩 사 오셨을 때 두부는 구두를 마당으로 집어던지며 외쳤다. “나는 네로 슈즈 신을 거야!” 네로의 신발을 유심히 살펴본 어머니께선 랜드로바라는 브랜드에서 신발을 사 오셨다.
“그땐 아무것도 모를 때였는데 네로가 신던 신발이 소년의 신발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냥 핑크색이 싫었고 동생이 마론인형 가지고 놀 때 나는 변신 로봇을 갖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 사주시니까 종이 접기로 우주선 접고 그랬어요.”
두부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떤 여자애를 좋아하게 됐다. 그때 처음 자각했다. ‘내가 남들과 뭔가가 다르구나.’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엔 집에 피시통신이 깔렸다. 당시 앤티카라는 지금의 다음 카페와 같은 커뮤니티가 있었고 두부는 S.E.S 팬클럽 소모임에 가입했다.
“알고 보니 그 소모임 회원들이 다 이반이었어요. 저만 숏컷이었고 언니들은 다 머긴부(머리 긴 부치)?” 두부가 첫 모임을 나간 날 언니들은 단박에 말했다. “너는 부치야.” 두부는 그때 부치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부치가 뭐냐고 물어본 두부에게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너 여자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너 같은 애들을 부치라고 해.” 그래서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아, 나 같은 사람들을 부치라고 하는구나.’
제가 생각하는 부치는, 젠더퀴어나 트랜스 남성이 아니고 자신이 여성임을 받아들이면서도 중성적인 매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머긴부, 단머부(단발머리 부치), 티부(외모만 봐도 레즈비언임이 티나는 부치) 다 중성적인 면이 있어요. 화장하는 부치도 그렇고요. 그런 중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싶어 한다면 다 부치 아닐까요.
이반 언니들은 두부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당시 티지넷(레즈비언 커뮤니티)은 미성년자 가입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언니들이 아이디를 공유해준 덕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티지넷을 눈팅할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도 없었다. 남들과는 달리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커뮤니티 번개 모임에 나가고 레즈비언 클럽에 가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아웃팅이라는 단어도 들어보지 못했다. 친구들이 나를 인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마냥 행복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니 위축됐다. 주변 상황이 두부를 그렇게 만들었다. 화장하기도 싫었고, 동기들처럼 삐딱 구두를 신고 출근하기도 싫었다. 맨얼굴에 중성적인 차림새로 출근하는 두부를 상사들은 이상하게 쳐다봤다. 분명 자신이 다른 동기들보다 더 일을 잘하는 것 같은데 일 잘한다는 평가는 받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 있어?”라는 질문에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무수히 고민했다. 없다고 하면 “아 그래, 없을 것 같았어.”라고 말하는 남자 동료들이 싫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서 이런 대우받는 건가? 나도 일반 여성처럼 차려입고 나오면 이런 대접 안 받아도 되나?’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입을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보기가 힘들었다.
“제가 요즘 직장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나 장난 아니야 걸크러쉬. 나 남자들한테도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 사람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는 저만의 재미있는 운동이죠. 일부러 남자 직원들한테 가서 ‘너 비비 뭐 발랐어, 내 비비 추천해줄까?’ 이러기도 하고요.”
연차가 쌓이고 경력도 쌓인 두부는 자신감이 생겼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니고, 어떤 모습이더라도 ‘나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직장 동료들에게 어필한다.
“큰 고민은 아니지만 내가 성소수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활동을 해야 커뮤니티에 보탬이 될까 하는 게 고민 1순위예요. 애인 사귀는 게 2순위고요.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직장에서의 커밍아웃은 당장 못 하겠어요. 지금의 사회에선 커밍아웃을 한다면 제가 잃을 게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서 성소수자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할 거예요.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이성애자 커플들이 누리는 것들을 우리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요.”
애인과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쟤네 레즈비언 아니야?”하고 수군댄다면 “네 맞아요~”하고 행복하게, 즐겁게 대답해주는 커플이 되고 싶다는 두부. 예전엔 그냥 숨기고 싶고 어떻게든 들키지 않고 레즈비언으로 살고 싶었다면 요즘은 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레즈비언으로 살고 싶다는 두부다. 물론 직장 내에서도 말이다.
앞으로의 연재 계획
제 주변 성소수자들 중 퀴어인컴퍼니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지인들을 한 분 한 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모은 인터뷰이들은 5명입니다. 앞으로 연재될 인터뷰들을 읽어주시고, 인터뷰이로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싶으신 퀴어 독자가 계신다면 이메일(queerincompany@gmail.com)이나 QiC 트위터 공식계정(@queerincompany)으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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