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반복되는 삶의 패턴이 있다. 불편하거나 부당한 상황을 마주할 때 얘기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다.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참거나, 말한다. 참으면 심장이 빨리 뛰고 그 상황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고 답답하다.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똑같이 심장이 빨리 뛰고 몸이 덜덜 떨린다. 대부분 참지 못해서 얘기한다.
이 패턴이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생 시절부터다. 집에서 담배 피우는 아버지에게 담배 냄새난다고 코를 막으며 말했다가 아버지가 정말 무섭게 화를 냈다. 또, 학교에서 한 선생님은 반 친구를 뚱뚱하고 공부 못한다고 놀렸다. 너무 화가 나서 반성하시라는 내용을 일기장에 길게 써서 냈다. 또 옆 반 무서운 잘 나가는 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 욕을 하고 다녀서 나도 똑같이 그 아이 욕을 하고 다녔더니 멱살 잡힌 적이 있었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들에 얘기했을 때 좋은 반응이 돌아온 적은 거의 없었다. 건방진 년, 겁 없는 애가 되기 더 쉬웠다.
어쩌다 <하루 한번 호오포노포노>라는 하와이 영성 책을 접하고 달라졌다. 책에서는 모든 가해자들은 한 때 피해자였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자신의 상처를 잘 보듬지 못했기 때문에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억압을 되풀이한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았다. 그러면 못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하니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이 치유되길 바라면 될 일이었다.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서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억압자를 이해하는 동안 피억압자는 계속 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 상황에서 내가 당사자가 아닐 때 이런 태도는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고 피억압자에게 또다시 고통을 준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억압하는 사람의 편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결국 다시 말하기 시작했고, 나의 패턴도 또 반복되기 시작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심리적 상태를 조금 더 고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더 달라진 점은 이제 대학생이 되면서 상대방이 절대 권력을 가진 교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수에게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며 이미 총 네 명의 교수에게 수업 중 성차별적이고 권위적인 발언 등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익명으로 얘기해야지, 생각했다가도 못 참아서 손들고 얘기했다. 물론 돌아오는 반응은 좋지 않다. 그날 기분은 잡친다. 그러나 한 번쯤 교수님들이 길을 걷다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미셸 푸코의 <담론과 진실 : 파레시아>에서는 ‘파레시아’라는 개념이 나온다. ‘모든 것을 말하기’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파레시아’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렇기에 늘 화자는 대화 상대자보다 열등한 위치에 놓이며 약하다. 아테나이 시민의 정치적 권리이자 철학 담론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파레시아가 출현하는 공간은 광장이 아닌 궁정이었다고 한다. 미셸 푸코는 이 ‘파레시아’를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찰을 위한 역할이라고 여기고 이에 대해 연구를 하고 강연을 했다. 이 개념을 알고 나는 어쩌면 건방진 애가 아니고 ‘파레시아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매번 용기를 내야하고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