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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wondo Jun 01. 2019

미치거나 혹은 미치거나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멋진 신세계』를 읽고

    “인간은 필연적으로 미칠 수밖에 없다.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광기에 해당한다.” 책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인용한 블레즈 파스칼의 문장이다. 덧붙여 바우만은 “사회에 순응함으로써 얻는 것은 무차별적인 물리적 힘으로부터의 해방이라기보다는 그러한 힘에 대해 골몰하는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보는 게 맞다”며 때로는 깨달음이 삶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소설 <멋진 신세계>는 사회의 문제를 의식한 사람들이 어떤 방식을 취하는지 따라가며 전개된다.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사회에 복종하는 삶, 혹은 그에 저항하는 삶 중 어느 삶이 나은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지만 결국 그 어느 것 하나 좋은 상태로 남지 못한다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하여 머나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그 속에 살아가는 개인들을 더 비추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세계대전 시기를 겪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그리고 시인이다. 그가 쓴 <멋진 신세계>는 20세기에 쓰인 미래 소설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작품이라고 불린다. 1932년도에 출판됐지만, 책 내용의 배경은 헨리 포드가 태어난 1863년을 기준으로 포드 기원 632년을 그리고 있다. 서기 2496년이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생산성을 효율적으로 늘린 포드주의가, 세계적으로는 이탈리아와 독일, 소련에서 전체주의 통치가 행해지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소설은 과학만능주의와 전체주의 사상이 합쳐진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의 미래 사회는 과학기술은 발달했지만, 인류의 의식은 오히려 후퇴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은 컨베이어 벨트 위의 병 안에서 계급에 따라 균등하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개인의 모든 활동은 세계국가의 유지를 위해 존재한다. 안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롭다고 교의 주입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체적이지 못하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삶을 살아간다. 생각할 힘도, 감정을 느끼는 자유도 통제된다. 유희가 있지만, 강요와 계획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뿐이다. 낡은 문학과 시 같은 예술은 철저히 금지된다. 격렬하고 비효율적인 과거에만 존재했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현재의 안정과 행복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체의 감각만을 자극하는 촉감영화와 마약과 같은 소마라는 알약만 허락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계급과 존재를 긍정하고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인 버나드 마르크스, 그의 친구인 헬름홀츠 왓슨은 이런 사회를 뒤흔들고 분열을 내는 위험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다. 버나드는 알파 계급이지만 태아일 때 혈액에 알콜이 잘못 주입돼(추정) 육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늘 하층계급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더 높은 계급의 대우를 받지 못할까 봐 열등감에 시달린다. 반대로 헬름홀츠는 다른 사람들보다 지나치게 유능해서 오히려 고립감을 느낀다. 이 둘은 열등하고 우등해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계획되지 않은 뒤틀린 존재들이라는 점은 같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로움을 갈망하고 절대 금지인 고독에 대한 시를 쓴다. 이 주인공들은 사회를 의심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 지금은 어떨까. 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들은 생존과 경쟁의 굴레에 빠져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버나드와 헬름홀츠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이 이런 주장은 개인의 결핍과 문제로 치부되기에 십상이지만 말이다.


    소설은 사회에 복종하는 개인, 저항하는 개인 어느 쪽이 되든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태어난 존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존은 멋진 신세계를 동경해왔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오던 자유로운 세계와 너무 다른 모습에 크게 실망한다. ‘악몽 같은 획일, 구별할 수 없는 닮은 꼴들의 군집’이라는 것을 깨닫고 노예 계급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 그리고 불행해질 권리를 원한다고 총통에게 말한다. 그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결국 사회로부터 도피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정신이상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이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모두 부정했을 때에 더는 그 사회에 남아있을 수 없으며, 사회에서 벗어나더라도 한동안 건강한 상태를 되찾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존이 대중을 미쳤다고 생각한 것처럼 반대로 대중은 존을 광기 가득한 존재로 생각하며 구경거리 취급을 한다.


    ‘공유, 균등, 안정’은 세계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표어다. 전체주의하에서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개인은 무조건 위험 존재로 찍히며 차단된다. 지금 사회의 표어는‘경쟁, 성장,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경제적 능력, 인종, 학벌, 젠더, 외모 등으로 계급이 존재한다. 겉으로는 평등을 지향하지만, 관습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불평등하다. 세계화를 통해 양극화는 더 심해진다. 적어도 멋진 신세계에서는 수면 시 교육을 통해 자신의 계급을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는 더 높은 계급을 꿈꾸지만 불가능한 현실과 늘 마주해야 한다. 소마와 같은 환상적인 알약도 받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은 더 열심히 자신의 소비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계급 상승을 소원하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발견했을 때에 현실과 이상 사이를 헤매며 인지 부조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가 지금 사회와 비슷하며,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느껴졌다.


     바우만, 파스칼, 헉슬리 모두 우리는 필연적으로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멋진 신세계 속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노예들처럼 공유되는 광기는 더 이상 광기가 아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사회의 관습을 따르는 것이 안정적이다. 지금의 사회에서도 이 불안한 사회에 순응하며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에 대해 사고한다면 사회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고 예측할 수 없게 이끌고 간 <멋진 신세계>를 가벼운 마음으로만 읽을 수 없었다. 정말로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헉슬리가 미래 사회를 상당히 비관적인 사회를 연출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은? 깨달음이 삶의 의지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깨달음은 더 나은 존재, 세상을 상상할 기회를 쥐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미치거나 포기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현실과 이상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더 행동했더라면 어땠을까? 버나드가 존을 빌미로 계급 상승을 원하지 않았더라면, 헬름홀츠가 고독에 대한 시를 더 학생들에게 읊어줬더라면, 존이 죄책감을 느끼며 채찍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사회에 균열을 내는 행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치지 않을 권리가 더 주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참고문헌

·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역, 『멋진신세계』, 문예출판사, 2018.

· 지그문트 바우만, 홍지수 역,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봄아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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